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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침략 반대"라는 사회적 합의 - 박노자

애당초에 "침략"이라는 것은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묵자 (墨子)와 같은 선각들이야 이미 춘추전국 시대 이후로부터 있어 왔지만, 대체로 근세 말기까지 무력을 써서 영토를 얻는 것은 그저 봉건 영주나 절대 왕국의 군주들의 "상식"이었습니다. 이 상식 아닌 "상식"은 계몽기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볼테르의 <Histoire de l’empire de Russie sous Pierre le Grand> (彼得大帝 시대의 俄羅斯 제국사 ,1759)에서도 피터 1세의 각종 침략 전쟁들은 "위대한 성취"로 미화돼 있는 것이죠. 계몽기까지만 해도 군사력 사용을 통한 군주의 영토 획득은, 자본가의 이윤 창출 등과 같은 "합법적 사업"으로 인식됐습니다. 실은 용병들을 대거 사용했던 그 당시의 전쟁들은 일종의 "사업"과 많은 면에서 상당히 흡사했죠. 군주들이 은행가들의 돈을 빌려 용병 등을 고용하고, 일정한 영토를 무력으로 확보하고 그 주민들에게 뜯어낸 세금 돈 등으로 빚을 갚고 추가적으로 소득을 올리곤 했습니다. 아마도 전쟁이라는 "특별한 비즈니스"에 대해 "비정상"이라고 본 최초의 계몽기 후기의 사상가는 간트 정도일 겁니다. 그의 <영구 평화론> (1795년)은 전쟁 아닌 평화를 민주 국가의 "정상적 상태"로 정의했죠. 군주국들의 "정상"은 18세기의 경우에는 전쟁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데 입헌 군주제/공화제의 시대인 19세기나 20세기 초반에도 특히 식민지 획득을 위한 침략에 대한 반대란 여전히 "소수"의 몫이었습니다. 예컨대 일본에서 1910년에 한국 "합방"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긴 것은 고토쿠 슈수이 (幸徳 秋水) 등 초기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 일부와 이시카와 다쿠보쿠 (石川 啄木) 같은 일부 비주류 지식인 등이었습니다. 1914년에 제1차 대전이 벌어졌을 때에 볼셰비키와 같은 철저한 반전의 입장은 구미권의 사회주의/사민주의자 중에서도 소수에 국한돼 있었습니다. 한데 제1차 대전의 미증유의 도살은, 침략 전쟁을 "범죄"로 보려는 새로운 시각을 주류화시킨 것이죠. 1928년의 켈로그-브리앙 조약 (파리 조약)은, 바로 이와 같은 새로운 시각을 "법제화" 시킨 것입니다.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의무화시킨 그 조약은, 차후 뉘른베르그 재판과 동경 재판에서 파쇼 독일과 일제 전범들을 "평화에 대한 범죄" 혐의, 즉 "침략 전쟁 준비 및 도발, 수행" 혐의로 고소하여 유죄 판결을 언도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침략의 당연시"가 아닌 "침략 반대"는 국제적으로 새로운 통념으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물론 "침략 반대"가 통념화됐다고 해서 침략이 없어진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한데 침략 강행은, 전후의 세계에서는 엄창난 도덕적 자본 (moral capital), 즉 명분의 상실을 수반했습니다. 예컨대 미국이 베트남에서 북베트남 폭격 및 캄보디아, 라오스 폭격 등 명백한 침략 행위를 감행해도 "법적 처벌"을 받진 않았지만, 1968년 이후로는 전세계적으로 규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패권 상실"을 처음 논하게 된 것은 1970년대인데, 그 근거는 바로 베트남에서의 현실적 패배와 전세계적인 침략국이라는 "누명"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세계적 "반미" 유행이 한국까지 번진 것은 1980년대초반부터지만 말입니다. 똑같은 스토리는,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에도 반복됐습니다. 1991년부터 일극 체제를 운영해온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함과 함께 세계 패권 국가라는 도덕적 헤게모니를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라크 침략의 긍극적인 패배까지 더하여 심각한 패권 쇠락 국면이 열리게 된 것이죠. 이라크 침략 과정에서 잃어버린 그 명분을, 미국이 지금 우크라이나 지원을 하면서 다시 되찾으려 하는 것이라 봐도 됩니다. 그게 대미 호감도가 막 오른 대부분의 유럽 국가나 일본, 한국, 대만에서 어느 선까지 통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밖에서의 세계에서는 미국의 명분 상실이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선까지 간 데도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미국이 이미 2003-9년에 이라크 침략으로 명분 상실을 경험했지만, 지금 그 이상의 상징 자본 상실을 경험하는 나라는 러시아입니다. 사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같은 경우에는 이라크 침공 이상으로 죄질이 나쁘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상당합니다. 미국은 침략을 감행해도 이라크 영토를 할양 받아 합병하려는 등의 영토 강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건 정확히 "영토 강탈"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규모의 타국에 대한 강제적/폭력적 영토 강탈은, 세계 전후사에서는 그 유례 찾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러시아는 이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강탈할 수 있을지는, 지금 저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불확실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한데 한 가지만 확실합니다. 러시아는 이렇게 해서 영토와 자원, 일부의 추가적 인구를 무력으로 얻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상징 자본은 침략 전쟁의 화염 속에서 거의 남는 것없이 "소각"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침략의 현장과 가까운 유럽에서 말입니다. 대러시아 제재 등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유럽의 직간접적 무역 정도야 어느 정도 지속되겠지만,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투자나 기술 이전, 연구/교육 협력 등은 앞으로 수십년간 없거나 최소한의 수준에서 유지될 전망입니다. 침략국에 대해 "신뢰"라는 게 없으니까요.

결국 구미권과의 그 어떤 "신뢰" 관계가 불가능해진 차후의 러시아는, 당장의 경제적 타격은 없거나 크지 않아도 장기적으로는 선진권과의 기술 이전/연구 협력의 결여로 아마도 궁극적으로 그 "주변화" (peripherialization)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 될 것입니다.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잃을 수 있는 그 어떤 세계적 패권도 없습니다. 한데 결국 패권이 아닌 발전의 가능성들, 선진화의 가능성들을 잃게 될 셈이죠. "침략 반대"라는 전후 세계의 통념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결국 러시아로서는 일종의 미래에 대한 "포기"입니다. 한데 국가 폭력 기구 종사자들이 수장으로 있는 독재라는 것은, 그다지 미래 지향적이지 않는 경우들이 세계적으로 허다합니다...

 

 

댓글 3

킹쿤타랑양자경 2023.02.04. 08:25
첫번째 문단 뒤에서부터 두번째줄 간트는 칸트인거 같네요. 러시아가 철저히 붕괴되고 중국이 이를 타산지석 삼아서 더 이상의 침략과 억압은 그만뒀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역사의 흐름은 그렇지않다는걸 요새 전세계 곳곳에서 보여주는거같아서 무섭습니다....
댓글
리나군 작성자 2023.02.04. 10:35
 킹쿤타랑양자경
박노자씨 글에 오타 많아요 ㅋㅋ 그건 그냥 보심 될듯.
중국이 과연 러시아를 보고 어떤 형태로 학습할지에 대해서가 궁금합니다. 다만 중국 정권은 코로나로 타격을 받았지만, 러시아만큼 먹고사는 문제에서 절박한 타격은 아직 아닌지라 조금 더 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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