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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칼럼 1950년대 수상 총 결산[발롱도르~]

안녕하세요, 축구 역사 매니아 레드 아카이브입니다. 

 

이번에 저와 같은 축구 역사 매니아이자 축구 블로거이신 토르난테님과 함께 대형 프로젝트를 합동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희가 속한 크리에이터 팀, FCU의 이름을 걸고 연도별로 가상의 상을 시상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오늘날처럼 연도별 최고의 자리에게 주는 상이 많지 않았으며, 상이 있어도 당시에 상을 받은 선수들의 명예와 인지도가 오늘날까지 잘 이어져오지 않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수상 결과에 대한 반론의 여지가 있어도 이를 재평가한 자료가 적어서 '과거에는 누가 최고였는가'와 같은 주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축구 역사를 연 단위로 끊어서 최고의 자리에 대해 재평가를 진행하고, 여러 부문에서 최고를 직접 선정해보기로 하였습니다. 

 

평가 부문은 연도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감독, 특별상(최고의 골키퍼, 최고의 유망주, 최고의 수비형 플레이어,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최고의 공격수, 최고의 주장),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최고의 팀이며 최상위권의 순위와 후보 노미네이트까지 진행합니다. 

 

시작은 1950년부터이며, 하는 김에 2022년까지 쭉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 뒤에는 더 이전 시대에도 동일한 평가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물론 저희 평가자 2인의 주관(축구를 보는 관점, 스타일에 대한 선호도 등)이 반영되었으며 각 평가자의 성향은 글 하단에 간략히 적어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각자의 주관에 맞게 스스로 평가해보시면 분명히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저희도 그러한 의견 교환을 바라고 있습니다. 

 

연도별 최고의 선수는 두 평가자가 합동으로 평가하였고, 최고의 감독, 특별상,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은 토르난테님께서 맡아주셨고 최고의 팀은 제가 맡아서 선정하였습니다. 

 

또한 설명을 비롯한 아래의 본문은 토르난테님께서 작성하셨고 서문과 공유는 제가 전담하였습니다. 

 

그럼 즐거운 감상과 소통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1950년대가 마무리된 기념으로 1950년대 수상의 총 결산을 진행해보겠습니다. 

 

 

블로그 원문 

https://dongneazesoccer.tistory.com/m/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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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1. 이 프로젝트는 티스토리 블로거이자 풋볼 크리에이터 연합(약칭 FCU) 소속 크리에이터 토르난테와 Red Archive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컨텐츠입니다.

2. 선정기간의 기준은 추춘제 리그의 경우에는 1949-50 시즌부터 1958-59 시즌을 기준으로, 춘추제 리그의 경우에는 1950 시즌부터 1959 시즌까지로 잡았으며 1950년 1월 1일부터 1959년 12월 31일까지 열린 국제대회를 모두 포함했습니다.

3. 포인트 합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3-1. 선수

최초 노미네이트 50인 선정- 1p 추가
최종 노미네이트 30인 선정- 1p 추가
토르난테 선정 TOTY 선정- 1p 추가 

올해의 선수 10위 선정- 1.5p 추가
올해의 선수 9위 선정- 2p 추가
올해의 선수 8위 선정- 3p 추가
올해의 선수 7위 선정- 4p 추가
올해의 선수 6위 선정- 5p 추가
올해의 선수 5위 선정- 6p 추가
올해의 선수 4위 선정- 7p 추가
브론즈볼 선정- 9p 추가
실버볼 선정- 10p 추가
골든볼 선정- 12p 추가

*특별상 부문은 추가 점수 없음

즉 골든볼에 선정하면 앞 최초 노미네이트, 최종 노미네이트, TOTY는 무조건 선정되기에 최대 15포인트를 받는데 이게 한 해 만점.

3-2. 감독

골든 바통- 10p 추가
실버 바통- 6p 추가
브론즈 바통- 3p 추가
노미네이트- 1p 추가

3-3. 클럽

골든 팀- 5p 추가
실버 팀- 3p 추가
브론즈 팀- 1p 추가

3-4. TOTD 선정 방식

모든 부문은 상술한 포인트 부분을 따릅니다.

골키퍼-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풀백- 라이트 풀백과 레프트 풀백 각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단 양측면으로 분류된 선수는 좌우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지만 한쪽 측면으로 고정된 선수의 경우에는 해당 측면에서만 선정할 수 있습니다.

센터 하프-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윙 하프- 리이트 하프와 레프트 하프 각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단 양측면으로 분류된 선수는 좌우은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지만 한쪽 측면으로 고정된 선수의 경우에는 해당 측면에서만 선정할 수 있습니다.

인사이드 포워드- 최고 득점자 2명 선정

아웃사이드 포워드- 아웃사이드 라이트와 아웃사이드 레프트 각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단 양측면으로 분류된 선수는 좌우은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지만 한쪽 측면으로 고정된 선수의 경우에는 해당 측면에서만 선정할 수 있습니다.

센터 포워드-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감독-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3-5. 플레티넘 보이 및 플레티넘 암밴드 선정 방식

골든 보이 수상자 10명 중 신인상 수상 해에 퍼포먼스가 가장 뛰어난 선수 한 명에게만 수상합니다.

4. 이번 랭킹의 선정 기준은 특별상과 최고의 국가대표팀 부문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포인트 합산으로 선정합니다.

5. 건조폼 사진 출처는 플레이어스에서 주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입니다.

 


1. Red Archive 선정 1959년 세계 최고의 축구팀

 

1위 플래티넘 클럽팀

 

 

 

 

레알 마드리드

 

업적

라리가: 4회 우승 (1953–54, 1954–55, 1956–57, 1957–58)
유러피언 컵: 4회 우승 (1955–56, 1956–57, 1957–58, 1958–59)
라틴 컵: 2회 우승 (1955, 1957)


10년 동안 라리가 4회 우승을 이뤄내며 스페인을 대표하는 클럽으로 발돋움했으며 라틴컵 2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4연패를 이뤄내며 유럽 무대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저승사자 군단이라 불리는 위엄을 선보였다.

 

그리고 1958-59 시즌에는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라는 꿈의 조합을 실현시켰으며,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맞은 라이벌 구단 바르셀로나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보다 높은 업적을 이룩하며 유럽 최고의 구단으로 올라섰다.

 

1위 플래티넘 국가대표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업적

1952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1953 중유럽컵 우승
1953-54 잉글랜드와의 세기의 대결 승리
1954 스위스 월드컵 준우승
1958 스웨덴 월드컵 16강 조별리그
A매치 32경기 연속 무패

 

1952 올림픽 축구 금메달, 1948-53 중유럽 컵 우승, 1954 월드컵 준우승, 1950년부터 1956년까지 약 6년간 A매치 42승 7무 1패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올렸으며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와의 세기의 대결에서는 웸블리 원정에서는 6-3으로, 안방 부다페스트에서는 7-1로 대승을 거두었다. 비록 유일한 패배를 월드컵 결승에서 당하며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이 기간 최강의 국가대표팀이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공격진영에서 보다 적극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강조하며 향후 토탈풋볼이 발전할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수비 상황에서 지역 방어의 개념을 일부 도입하며 4백 시스템에도 큰 영향을 주는 등 전술사적인 의미도 큰 팀이다. 비록 국내에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핵심 구성원들이 나라를 떠나면서 대표팀의 기조를 이어나가진 못하지만 이 팀의 강력함은 축구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 토르난테 선정 1950s Team Of The Decade

 

 

골키퍼

 

 

 

이름: 레프 야신
출생일: 1929년 10월 22일
국적: 소련
평가 기간 소속팀: 디나모 모스크바

 

1950년대 후반기, 그동안 국제 축구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소련 대표팀이 오랜 기간의 도광양회를 끝내고 자신의 기량을 펼치며 전설의 팀 매직 마자르의 헝가리와 무승부를 거두며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소련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레프 야신은 소련 대표팀의 약진을 이끌었음은 물론 소속팀 디나모 모스크바에서도 소비에트 탑 리그 4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야신 본인도 1954년부터 1959년까지 6년 연속으로 소련 탑 리그 시즌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자신의 가치를 높였다.

 

1950년대 최고의 골키퍼 선정 결과

 

 

 

 


라이트 풀백

 

 

 

 

이름: 자우마 산투스
출생일: 1929년 2월 27일
국적: 브라질
평가 기간 소속팀: 포르투게자, 파우메이라스


마라카냥에서의 월드컵 결승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우루과이에게 패한 브라질은 특히 수비진에서 강도 높은 세대교체를 단행했는데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자우마 산투스는 바위벽과 같은 수비력을 선보이며 브라질을 넘어 당대 세계 최고의 라이트 풀백으로 올라선다.

자우마 산투스는 리우 데 자네이루 주에 연고를 둔 포르투게자에서는 리우와 상파울루의 강호들이 모인 토르네오 리우상파울루컵에서 2회 우승을 이뤄내며 언더독의 유쾌한 반란을 이끌었으며 상 파울루 주에 연고를 둔 파우메이라스에서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 결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산투스의 에이스 중 한 명인 페페를 완벽하게 막아내며 생애 첫 주립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셀레상에서도 자우마 산투스의 활약은 빛났는데 1953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시작으로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시종일관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8강에서 탈락했음에도 문도 에스포르티보가 선정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1957 코파 아메리카에서 재차 준우승을 이뤄낸 뒤 1958 스웨덴 월드컵 스쿼드에도 포함되었으나 북유럽의 추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컨디션 난조를 겪으며 쭉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결승전 스웨덴전에서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며 우승에 기여했기에 결승전 단 한경기만 뛰었음에도 ESPN과 르퀴프지의 저명 기자 가브리엘 아노트가 선정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기도 했다.

 


레프트 풀백

 

 

 


이름: 니우통 산투스
출생일: 1925년 5월 16일
국적: 브라질
평가 기간 소속팀: 보타포구


1949년에 셀레상에 첫 데뷔한 니우통 산투스는 조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벤치를 달궜으나 조국이 우루과이에 밀려 월드컵 우승에 실패하며 수비진에서 강도 높은 세대교체를 단행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주전으로 도약했으며 수비수로서는 드문 측면에서 오버래핑해 공격에 가담하는 충격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보타포구에서 데뷔해 활약 중인 니우통 산투스는 지지, 가린샤와 함께 보타포구의 전성기를 이끌며 1957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을 이뤄내며 리우 데 자네이루주에서 경쟁력을 보였으며 수비라인의 리더로서 팀을 세 번이나 주립 리그 최소 실점으로 이끌었다.

셀레상에서도 축구 백과사전 니우통 산투스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는데 1953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시작으로 1954 스위스 월드컵 8강, 1957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풀백의 공격이라는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면서도 수비적으로도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며 조국의 우승을 이끌었고 니우통 산투스 개인도 비공식 올스타 팀 포함 6개의 매체에서 모두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위엄을 뽐냈다.

 

1950년대 최고의 좌우 풀백 선정 결과

 

 

 

 

 

센터 하프

 

 

 

 

이름: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출생일: 1926년 3월 7일
국적: 오스트리아
평가 기간 소속팀: 아우스트리아 빈, UC 삼프도리아


제2차 세계대전 시절에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하며 1930년대 초반에 빛났던 분더팀의 정신을 이어나가지 못했던 오스트리아 대표팀은 오크비르크라는 대형 센터하프가 절정의 기량을 뽐내기 시작하자 다시 축구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세간으로부터 시계태엽이라 불렸을 정도로 일관성 있는 활약을 보여주며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전성기를 보낸 오크비르크는 소속팀을 이끌고 1950년과 1953년에 정규리그 2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52년의 소규모 클럽 월드컵인 코파 히우에서 팀을 4강에 올리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53년에는 FIFA XI으로 선정되어 잉글랜드 FA 창립 90주년 기념 경기에 출전하며 창의적인 패스로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하며 4-4 무승부를 기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발군인데 게르하르트 하나피, 오크비르크, 카를 콜러라는 역대급 중원 라인의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조국이 3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는데 특히  특히 로잔의 열전이라 불리는 개최국 스위스와의 8강전 경기에서는 팀의 4번째 득점을 기록해 0-3 스코어를 4-3으로 뒤집으며 최종 스코어 7-5 대승을 이끌었으며 이 활약을 인정받아 문도 에스포르티보가 선정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이후 삼프도리아에서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1950년대 최고의 센터 하프 선정 결과

 

 

 

 

 

라이트 하프

 

 

 

 

이름: 지지
출생일: 1928년 10월 8일
국적: 브라질
평가 기간 소속팀: 플루미넨시, 보타포구, 레알 마드리드


마라카냥의 비극 이후부터 펠레 등장 이전까지 1950년대 브라질 축구의 아이콘으로 명성을 날렸던 지지는 하프백과 인사이드 라이트, 그리고 아웃사이드 라이트에서 모두 뛰어난 기량을 보여줬으며 그라운드의 감독으로 군림하며 감독의 전술을 팀원들에게 전파하며 지휘하는 야전 사령관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플루미넨시에서 월드클래스의 반열에 오르며 1951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및 1952년에는 소규모의 클럽 월드컵인 코파 히우 우승을 이뤄내는데 기여하며 결승전 코린치안스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며 이름값을 높이며 셀레상에도 승선해 1953 코파 아메리카와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1956년에는 보타포구로 이적했는데 특히 1957년에는 니우통 산투스, 가린샤와 함께 팀을 리우 데 자네이루의 챔피언으로 올렸으며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코파 아메리카에서 8골을 득점하며 조국의 준우승 및 개인 득점 2위를 기록했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팀의 중원 사령관으로 조국의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비공식 올스타 팀을 포함해 6개 매체에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레프트 하프

 

 

 


이름: 요제프 보직
출생일: 1925년 11월 28일
국적: 헝가리
평가 기간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195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하프백이자 매직 마자르의 든든한 후방 플레이메이커였던 보직은 공수 양면에서 완벽한 기량을 펼쳤던 중원 사령관이다.

페렌츠 푸스카스, 산도르 코치슈 등과 함께 부다페스트 혼베드에서 활약하며 헝가리 넴제티 버이녹샤그 5회 우승을 이뤄내며 1950년대 상반기 유럽을 호령했음은 물론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매직 마자르 군단의 신화를 이뤄내며 중유럽컵 우승,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성과를 이뤄냈으며 보직 개인도 1952년 헝가리 올해의 축구선수를 수상했다.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기대와는 달리 서독의 활약으로 우승을 이뤄내진 못햇지만 보직 개인의 퍼포먼스는 뛰어나 문도 에스포르티보와 ESPN이 선정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모두 선정되었다.

헝가리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푸스카스와 코치슈, 치보르가 스페인으로 떠난 뒤에도 홀로 외롭게 부다페스트 혼베드를 이끌었던 요제프 보직은 매직 마자르의 신화가 끝난 이후에도 마자르 군단을 이끌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참가하기도 했다.
 

1950년대 최고의 좌우 윙 하프 선정 결과

 

 

 

 

 

인사이드 라이트

 

 

 

 

이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출생일: 1926년 7월 4일
국적: 스페인, 아르헨티나
평가 기간 소속팀: 미요나리오스, 레알 마드리드


1950년대 최고의 축구 선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전설적인 명장 엘레니오 에레라는 그를 두고 "디 스테파노는 최고의 공격수이자, 최고의 미드필더이자, 최고의 수비수이다."라고 칭찬했다.

비록 엘도라도라 불리던 콜롬비아 리그로 떠나면서 한동안 세계인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스페인에서 암흑기를 겪던 레알 마드리드로 입성한 뒤 입단 첫해에 리그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54-55 시즌에는 라리가와 라틴컵 더블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5-56 시즌부터 1958-59 시즌까지 유러피언 컵 4연패를 이뤄냈음은 물론 1956-57 시즌에는 라리가와 유러피언 컵, 그리고 라틴컵을 모두 제패하며 3관왕을 이뤄내며 암흑기에 빠진 구단을 전성기의 궤도에 올리며 저승사자 군단의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구단의 황금기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227경기에 나서며 194골을 득점했으며 73회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친 디 스테파는 라리가 최다 득점자에게 수여하는 피치치 트로피를 5회 수상했으며 1957-58 시즌에는 리그는 물론 코파 델 레이와 유러피언컵에서도 득점왕에 오르며 득점왕 3관왕을 이뤄냈으며 1957년과 1959년에는 스페인 올해의 체육선수상을 수상했다.

비록 스페인 대표팀을 월드컵으로 인도하지는 못했지만 스페인으로 귀화한 뒤 출전한 A매치에서도 16경기에 출전해 14골을 득점하며 개인은 제 몫을 다했다.

 

 

인사이드 레프트

 

 

 

 

이름: 후안 스키아피노
출생일: 1925년 7월 28일
국적: 우루과이, 이탈리아
평가 기간 소속팀: CA 페냐롤, AC 밀란


우루과이 축구의 위상을 유럽 무대에서도 빛낸 후안 스키아피노는 우수한 테크닉과 넓은 시야, 창의적이면서 정확한 패싱력을 보유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해 불리한 경기를 수도 없이 뒤집는 게임 체인저였다.

1950년대 우루과이의 명문 페냐롤에서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이며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토르네오 데 아더 4연패를 이뤄냈고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1년과 1953년에는 토르네오 캄펜테시아까지 우승하며 도메스틱 트레블을 이뤄냈고 1954 시즌에는 리그 무패 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50 브라질 월드컵 결승 리그 최종전에서 개최국 브라질을 상대로 동점골을 득점하며 우승에 기여했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조국의 4강 신화를 이끌며 팀의 플레이메이커로서 그들을 훌륭하게 이끌며 조별리그 스코틀랜드전 7-0 대승과 8강 잉글랜드전 4-2 대승을 이끌며 준결승에 진출했고 준결승전에서도 매직 마자르를 상대로 호버그의 멀티골을 도우며 연장까지 갔으나 연장 혈투 끝에 아쉽게 패하며 4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스키아피노의 활약은 대단해 문도 에스포르티보 선정 1954 스위스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이후 유럽 무대에 도전장을 내며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C 밀란으로 이적해 입단 첫 시즌인 1954-55 시즌에 팀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5-56 라틴 컵 우승, 1956-57 시즌과 1958-59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며 이탈리아 무대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1950년대 최고의 좌우 인사이드 포워드 선정 결과

 

 

 

 

 

아웃사이드 라이트

 

 

 


이름: 줄리뉴
출생일: 1929년 7월 29일
국적: 브라질
평가 기간 소속팀: 포르투게자, 플루미넨시, 피오렌티나, 파우메이라스


1950년대 세계 최고의 아웃사이드 포워드 줄리뉴는 훌륭한 드리블과 개인기 스킬을 활용한 날카로운 컷인 플레이는 물론 크로스로 공격을 지원하는 능력도 당대 최고였다.

리우 데 자네이루 주에 연고를 둔 포르투게자에서 자우마 산투스와 함께 활약한 줄리뉴는 약체라  평가받는 팀을 리우와 상파울루의 강팀들이 참가하는 토르네오 리우상파울루컵에 진출했음은 물론 1952년과 1955년에 2회 우승을 이뤄내며 언더독의 유쾌한 반란을 이끌었으며 1953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5골을 득점하며 대회 득점 2위에 올랐음은 물론 조국의 준우승을 이뤄냈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도 셀레상 소속으로 참가했다.

이후 1955-56 시즌에 세리에 A의 피오렌티나로 이적하며 팀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끌며 피렌체의 왕으로 불렸으며 이듬해에는 세리에 A와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냈으나 다시 브라질로 돌아와 파우메이라스에서 활약하며 1959년 팀의 공격을 이끌며 펠레의 산투스와 함께 정규리그 공동 1위에 올랐으며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펠레의 선제골을 맞받아치며 동점골을 득점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 과정에서 줄리뉴는 주립 리그 15골을 기록했다.
 

 

아웃사이드 레프트

 

 

 


이름: 톰 핀니
출생일: 1922년 4월 5일
국적: 잉글랜드
평가 기간 소속팀: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메튜스와 함께 영국 축구 최고의 윙어로 평가받았던 '배관공' 톰 핀니는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양발 크로스, 그리고 강력한 슈팅을 왼발과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날렸으며 작은 채구와는 다르게 헤딩에도 능했다.

약체로 평가받으며 2부 리그에 머물기도 했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에 활약하면서도 결국 약팀인 프레스턴 노스 앤드의 에이스로 팀을 잉글랜드 풋볼 1부 리그 준우승 2회와 1953-54 시즌 FA컵 준우승을 이뤄내는 성과를 보이며 팬들은 군계일학의 핀니와 다른 선수를 두고 과거 그의 직업이었던 배관공을 언급하며 열 명의 떨거지들을 이끄는 한 명의 배관공이라 불렸는데 실제로 핀니는 PFA 올해의 선수에 2회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으며 1957-58 시즌에는 센터 포워드로 변신해 리그 34경기 26골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삼사자 군단에서도 1950년대에 열린 세 번의 월드컵에 모두 참가했으나 소속팀이 부진하며 개인의 퍼포먼스를 다 보여주진 못했지만 영연방의 4개 협회가 참가하는 대회인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는 8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1950년대 최고의 좌우 아웃사이드 포워드 선정 결과

 

 

1위 줄리뉴와 2위 가린샤가 모두 우측만 소화할 수 있으므로 좌측을 소화할 수 있는 차순위인 핀니가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선정되었다.

 

 

 

센터 포워드

 

 

 

 

이름: 페렌츠 푸스카스
출생일: 1927년 4월 1일
국적: 헝가리
평가 기간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레알 마드리드

 

인사이드 포워드와 최전방을 막힘없이 소화하는 질주하는 소령 페렌츠 푸스카스는 오직 왼발로만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을 합쳐 공식전 273골을 기록하는 괴력을 뽐냈으며 득점력뿐만이 아니라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대단해 팀 공격의 지휘자를 맡았다.

부다페스트 혼베드의 헝가리 넴제티 버이녹샤그 5회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푸스카스는 리그 득점왕에 3회 올랐으며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코치슈, 히데구티, 보직 등과 함께 매직 마자르의 시대를 열며 1952년에는 A매치 전승을 이뤄냈고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결승전에서 철벽 블라미디르 베아라를 상대로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1953년에는 매직 마자르 군단이 치른 8경기 중 7경기에 출전해 6골을 득점했고, 5년간 이어지던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냈는데 총 10골을 득점하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음은 물론 연말에 웸블리에서 열린 일명 세기의 대결에서는 히데구티와 함께 잉글랜드의 수비진을 유린하며 6-3 대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이 경기에서 당대 최고의 수비수 빌리 라이트를 상대로 일명 드래그백으로 농락하며 득점한 것을 포함해 멀티골을 기록했으며 창의적인 쓰루패스와 자로 잰 듯한 크로스로 히데구티의 해트트릭을 도우며 슈팅과 개인기는 물론 패스마저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이 경기로 증명했다.

1954년에는 웸블리에서의 패배를 복수하러 부다페스트로 원정온 잉글랜드를 상대로 멀티골을 기록하며 7-1 대승을 이뤄내며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매직 마자르의 우승을 이뤄낼 것으로 기대받았으나 조별리그 승자전에서 서독의 수비수 베르너 리브리히에 의해 부상을 당해 토너먼트 8강과 4강을 결장했으며 이 여파로 헝가리는 준결승 우루과이전에서 연장전까지 가며 많은 체력을 소모했기에 결국 몸상태가 완벽하지 못한 푸스카스가 결승전에서 선발 출전해 선제골을 넣었지만 서독의 맹렬한 반격에 3-2로 역전패하며 하필 4년 만에 패배를 월드컵 결승에서 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1956년에는 헝가리 혁명에서 정부군이 보인 진압 과정에 반발해 헝가리를 떠나며 원소속팀인 부다페스트 콘베드 복귀 거부로 인해 UEFA로부터 2년 출전 정지를 받았음에도 1958-59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며 축구계에 복귀했는데 복귀 첫 시즌에도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라리가를 포함해 공식전 34경기 25골을 득점하는 초인적인 활약을 펼치며 부활의 날갯짓을 펼쳤다.

 

1950년대 최고의 센터 포워드 선정 결과

 

 

 

 

 

 

1950s TOTD 베스트 일레븐

 

 

 

 

1950s TOTD 세컨드 일레븐

 

 

 

 


3. 토르난테 선정 1959년 축구 특별상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글러브

 

 


이름: 레프 야신
출생일: 1929년 10월 22일
국적: 소련
평가 기간 소속팀: 디나모 모스크바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5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보이

 

 

 

이름: 펠레
출생일: 1940년 10월 23일
국적: 브라질
소속팀: 산투스 FC


펠레는 실질적으로 데뷔 첫 시즌에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정규리그에서 19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을 2위로 올렸으며 상위 스플릿인 블루 시리즈에서도 17골을 기록하며 팀을 2위에 올렸으며 다시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만 36골을 기록하며 득점왕 2관왕에 성공했다.

심지어 펠레는 득점에만 집중하는 스코어러가 아니라 팀 공격을 이끄는 플레이메이커 역할도 수행했는데 그의 등장으로 산투스는 무려 144골을 기록하며 정규리그 1위 코린치안스보다 54골을, 최종 우승팀 상파울루 FC보다 45골을 더 득점하는 괴력을 보였을 정도로 공격진영에서 뛰어난 경기영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펠레는 1957 코파 아메리카 이후 셀레상에도 선발되어 대표팀 데뷔를 이뤄냈는데 아르헨티나와의 친선 컵대회인 로카 컵에서 1,2차전에 모두 출전해 모두 득점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17세 소년은 클럽과 대표팀을 모두 포함해 올해 공식전에서 40경기에 출전해 43골을 득점했으며 토르난테 & Red Archive 선정 1957년 F.C.U Football Award에서 신인상은 물론 올해의 선수 3위를 차지하며 브론즈볼을 수상하는 경이로운 퍼포먼스를 보이며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었기에 1957년의 펠레를 1950년대를 대표하는 슈퍼노바로 선정한다.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쉴드

 

 


이름: 요제프 보직
출생일: 1925년 11월 28일
국적: 헝가리
평가 기간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5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렌즈

 

 

 

이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출생일: 1926년 7월 4일
국적: 스페인, 아르헨티나
평가 기간 소속팀: 미요나리오스, 레알 마드리드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5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에로우

 

 

 

이름: 페렌츠 푸스카스
출생일: 1927년 4월 1일
국적: 헝가리
평가 기간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레알 마드리드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5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암밴드

 

 

 

이름: 옵둘리오 바렐라
출생일: 1917년 9월 20일
국적: 우루과이
소속팀: CA 페냐롤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우루과이와의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확정짓는 상황이었으며 결승리그 경기력도 브라질이 훨씬 좋았던 상황에서 브라질 언론은 이미 우승을 확정 지었다는듯한 기사를 냈다. 바렐라는 동료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바렐라는 이 신문들을 모아 동료들과 함께 오줌을 누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경기 당일, 동료들은 물론 감독도 브라질의 전력과 관중들의 기세에 눌려 수비축구를 지시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바렐라는 동요하는 감독 대신 팀을 진정시키며 "후안 로페즈는 좋은 감독이야. 하지만 오늘은 그의 판단이 틀렸어. 만약 우리가 수비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스페인이나 스웨덴과 같은 꼴을 당할 것이야."라는 말을 하며 감독의 체면을 지켜주면서 동시에 동료들을 진정하는 데 성공했으며 경기 시작 직전 "게임은 피치에서 이루어진다. 피치에 나오면 관중들을 신경 쓰지 마라. 그들은 단지 숲 밖에 있을 뿐이니까." 라며 연설해 동료들을 다잡았으며 킥오프 직전 동료들에게 "경기를 하는 것은 제삼자가 아니야. 자! 이제 쇼를 보여주자!!" 라며 독려했다.

브라질의 프리아사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뒤에도 당황하지 않고 심판에게 오프사이드라고 주장했으며 이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제 우리가 본때를 보여줄 때가 왔다!"라고 외치며 팀원들을 독려하며 팀의 우승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1950년대를 거치며 훌륭한 주장은 많았지만 '검은 우두머리' 옵둘리오 바렐라의 일화는 그것을 뛰어넘는 전설 그 자체였기에 1950년대 최고의 주장으로 그를 선정한다.

 


4. 토르난테 선정 1950년대 최고의 축구감독

 

 

1950년대 최고의 축구감독 선정 결과

 

 

 

 

 

토르난테 선정 1950년대 플래티넘 바통

 

 


이름: 구스타브 세베슈
국적: 헝가리
평가 기간 소속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디오슈죄르 VTK

 

업적

1952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1953 중유럽컵 우승
1953-54 잉글랜드와의 세기의 대결 승리
1954 스위스 월드컵 준우승
A매치 32경기 연속 무패

 

1950년대 최고의 감독에게 수상하는 플래티넘 바통은 포인트 합산 결과 구스타브 세베슈가 선정되었다.

매직 마자르 군단을 이끌고 A매치 32경기 무패, 중유럽컵 우승 및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세기의 대결에서 잉글랜드를 원정에서 6-3, 홈에서 7-1로 대파했음은 물론 비록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마지막 결승전에서 무패 행진이 깨지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조별리그에서 대한민국을 9-0, 서독을 8-3으로 대파하는 가공할 공격력을 보였으며 토너먼트에서는 지난 월드컵의 준우승국 브라질과 우승국 우루과이를 각각 4-2로 대파하며 남미의 강호들도 평정하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비단 저런 가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전술사적으로도 큰 획을 그었는데 다뉴브 학파가 스케치한 스위칭 플레이에 색을 입히며 완성도를 한층 더 높였으며 수비 지역에서도 수비계의 스위칭 플레이였던 베로우 시스템이 추구하던 부분적인 지역 방어를 위해 하프백의 줄라 로란트와 요제프 자카리아스의 커버 플레이를 적극 활용했고 이는 상 파울루 FC의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과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포백 시스템에 큰 영향을 줬으며 다른 하프백 요제프 보직은 1차 저지선의 임무를 부여받는 동시에 후방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동시에 맡으면서 기존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우루과이 축구계에서 연구하던 후방 플레이메이커를 활용한 더블 플레이메이커 체제를 한층 완성시키며 축구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비록 혼란한 국내 정세로 인해 매직 마자르는 와해되는 불행을 겪으며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1957년에 디오슈죄르 VTK에서 커리어를 조용하게 마무리했지만 그의 전술이 세계 축구에 미친 목소리는 결고 조용하지 않았다. 세베슈 당신은 1950년대 최고의 감독이다.

 


5. 토르난테 & Red Archive 공동 선정, 1959년 최고의 축구선수

 

 

1950년대 최고의 축구선수선정 결과

 

 

 

 

 

토르난테 &  Red Archive 선정 1950년대 플래티넘볼

 

 

 

이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출생일: 1926년 7월 4일
국적: 스페인, 아르헨티나
평가 기간 소속팀: 미요나리오스, 레알 마드리드

 

토르난테 & Red Archive 선정 FCU 어워드 골든볼 3회 수상
토르난테 & Red Archive 선정 FCU 어워드 올해의 선수 최초 및 최종 노미네이트 9회 선정
토르난테 선정 FCU 어워드 Team Of The Year XI 4회 선정

 

총 84포인트를 획득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82포인트를 획득한 푸스카스를 간신히 제치고 1950년대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선정했다.

디 스테파노는 불안한 정세의 콜롬비아 정부가 출범한 프로리그 엘도라도 측의 달콤한 꾀임에 속아 커리어를 낭비했으며 푸스카스는 본국의 공산정권의 만행으로 인해 복귀를 거부하며 UEFA에게 2년 출장 정지를 받는 페널티가 서로 있었으나 1955년부터 1957년까지 3년 연속으로 FCU 어워드 골든볼을 수상한 디 스테파노가 1950년부터 1955년까지 6년 연속으로 FCU 어워드 TOTY에 선정된 푸스카스를 제치고 지난 10년간 최고의 선수에게 수상하는 플레티넘볼을 수상했다.

비록 현재에는 초신성 펠레에게 거센 도전을 받고 있지만 디 스테파노가 50년대에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하며 펠레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이를 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시련을 극복한 디 스테파노의 업적은 대단하기 떄문이다.

이하 디 스테파노의 업적은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5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6. 평가자 소개

 

1. 토르난테


해당 블로그의 주인이자 F.C.U의 회장으로 축구역사 매니아, 중부 유럽과 남부 유럽 그리고 동부 유럽 축구에 관심이 많다.

선수와 감독을 평가하는 부분에서 전술적 상징성과 최고점에서의 퍼포먼스를 굉장히 중시하는 성향

응원팀: 바이에른 뮌헨, 인테르 밀란, 디나모 키이우
 

 

 

2. Red Archive


F.C.U의 회원으로 축구역사 매니아, 특히 남미 축구에 관심이 많다.

선수와 감독을 평가하는 부분에서 토르난테에 비해 상징성보다는 어빌리티에서 더 섬세하게 평가하는 성향

응원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CA 인데펜디엔테, 아스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은 힘이 됩니다.  

 

 

댓글 3

FCU회장 2023.03.06. 14:02
진짜 선정하면서도 가장 치열한 라이벌리였어요. 푸스카스vs디스테파노
댓글
호날두 작성자 2023.03.06. 15:03
 FCU회장
맞습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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