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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칼럼 1969년 세계 최고의 선수[발롱도르~]

안녕하세요, 축구 역사 매니아 레드 아카이브입니다. 

 

이번에 저와 같은 축구 역사 매니아이자 축구 블로거이신 토르난테님과 함께 대형 프로젝트를 합동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희가 속한 크리에이터 팀, FCU의 이름을 걸고 연도별로 가상의 상을 시상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오늘날처럼 연도별 최고의 자리에게 주는 상이 많지 않았으며, 상이 있어도 당시에 상을 받은 선수들의 명예와 인지도가 오늘날까지 잘 이어져오지 않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수상 결과에 대한 반론의 여지가 있어도 이를 재평가한 자료가 적어서 '과거에는 누가 최고였는가'와 같은 주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축구 역사를 연 단위로 끊어서 최고의 자리에 대해 재평가를 진행하고, 여러 부문에서 최고를 직접 선정해보기로 하였습니다. 

 

평가 부문은 연도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감독, 특별상(최고의 골키퍼, 최고의 유망주, 최고의 수비형 플레이어,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최고의 공격수, 최고의 주장),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최고의 팀이며 최상위권의 순위와 후보 노미네이트까지 진행합니다. 

 

시작은 1950년부터이며, 하는 김에 2022년까지 쭉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 뒤에는 더 이전 시대에도 동일한 평가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물론 저희 평가자 2인의 주관(축구를 보는 관점, 스타일에 대한 선호도 등)이 반영되었으며 각 평가자의 성향은 글 하단에 간략히 적어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각자의 주관에 맞게 스스로 평가해보시면 분명히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저희도 그러한 의견 교환을 바라고 있습니다. 

 

연도별 최고의 선수는 두 평가자가 합동으로 평가하였고, 최고의 감독, 특별상,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은 토르난테님께서 맡아주셨고 최고의 팀은 제가 맡아서 선정하였습니다. 

 

또한 설명을 비롯한 아래의 본문은 토르난테님께서 작성하셨고 서문과 공유는 제가 전담하였습니다. 

 

그럼 즐거운 감상과 소통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스무번째는 1969년입니다. 

 

 

블로그 원문 

https://dongneazesoccer.tistory.com/m/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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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1. 이 프로젝트는 티스토리 블로거이자 풋볼 크리에이터 연합(약칭 FCU) 소속 크리에이터 토르난테와 Red Archive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컨텐츠입니다.

2. 선정기간의 기준은 추춘제 리그의 경우에는 1968-69 시즌을 기준으로, 춘추제 리그의 경우에는 1969 시즌으로 잡았으며 1969년에 열린 국제대회를 모두 포함했습니다.

3. 상위 10인 外 최고의 축구선수 노미네이트는 출생일 순서대로 정렬했습니다.

4. 골든 보이의 기준은 해당 년도 12월 31일 기준 만 21세 이하의 선수로 한정되었으며 오직 한 번만 수상할 수 있습니다.

5. TOTY는 토르난테 혼자 선정하고 순위는 레드 아카이브와의 합산 및 토의로 선정해서 상충하는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토르난테 & Red Archive 공동 선정, 1969년 최고의 축구선수
 

 

1969년 최고의 축구선수 최초 노미네이트 50인

 

 

 

 


10위

 

 

 

이름: 빌럼 반 하네엄
출생일: 1944년 2월 20일
국적: 네덜란드
소속팀: 페예노르트

 

1969년 최고의 선수 10위에는 네덜란드의 독재자 아약스를 끌어내리고 페예노르트의 더블을 이끈 명 플레이메이커 빌럼 반 하네엄을 선정했다.

중앙 미드필더였음에도 에레데비시 31경기에 출전해 14골을 득점했음은 물론 오베 킨드발과 코엔 물린 같은 공격수들에게 양질의 패스를 공급하며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요한 크루이프와 라이벌리는 네덜란드 전역을 들썩이게 했다.
 

 

9위

 

 

 

이름: 조지 베스트
출생일: 1946년 5월 22일
국적: 북아일랜드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69년 최고의 선수 9위에는 비록 지난 시즌에 비해서는 약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축구계를 대표하는 천재 조지 베스트를 선정했다.

베스트의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무관에 그쳤지만 베스트 개인의 활약은 출중해서 정규리그 41경기에 출전해 19골을 득점한 것을 포함해 공식전 55경기 22골을 기록했다.
 

 

8위

 

 

 

이름: 토스탕
출생일: 1947년 1월 25일
국적: 브라질
소속팀: 크루제이루


1969년 최고의 선수 8위에는 미네이랑 주의 펠레라 불리는 천재적인 공격수 토스탕을 선정했다.

젊은 시절 펠레와 가장 유사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토스탕은 비록 4회 연속 주립리그 득점왕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주립리그에서 26승 4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냈으며 전국리그에서도 소속팀의 준우승을 이뤄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의 토스탕의 활약은 더 대단했는데 펠레와 함께 중앙 공격수로 나서며 1970 멕시코 월드컵 남미 예선 2조 6경기에 출전해 10골을 득점하며 조국 브라질의 예선 전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토스탕 개인도 월드컵 예선 전체 득점왕에 올랐다.
 

 

7위

 

 

 

이름: 프란츠 베켄바우어
출생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서독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1969년 최고의 선수 7위에는 24세의 젊은 나이에도 현세대를 넘어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의 반열에 올라선 프란츠 베켄바우어를 선정했다.

1965-66 시즌에 처음 분데스리가 무대를 밟은 소속팀 바이에른의 분데스리가 및 DFB포칼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키커지 선정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도 센터백과 미드필더에서 모두 월드클래스 등급 1위를 받았을 정도로 대단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서독 대표팀에서도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조국 서독의 1970 멕시코 월드컵 유럽 유럽 예선 7조에서 스코틀랜드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키프로스를 상대로 스코틀랜드 원정 무승부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서 승리하며 조국의 본선행을 이끌었다.

 

 

6위

 

 

 

이룜: 요한 크루이프
출생일: 1947년 4월 25일
국적: 네덜란드
소속팀: AFC 아약스

 

1969년 최고의 선수 6위에는 네덜란드를 넘어 유럽 무대에서도 저력을 발휘한 요한 크루이프를 선정했다.

비록 소속팀 아약스는 무관에 그쳤지만 크루이프 개인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정규리그 29경기에 출전해 24골을 득점했으며 유러피언 컵에서도 대단한 저력을 발휘해 준결승 벤피카와의 경기에서 홈에서 3-1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정 경기에서 멀티골을 득점하며 3-1 승리를 이끌며 승부를 플레이오프로 끌고 갔고 플레이오프에서도 연장 전반에 선제골을 터트리며 3-0 대승의 시발점 역할을 하며 팀의 결승 진출을 도왔고 크루이프 개인도 1라운드에서 약체를 상대로 7골을 몰아서 득점한 데니스 로 다음으로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비록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크루이프는 지안니 리베라와 함께 대회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으며 공식전 43경기 34득점을 기록했다.

 

 

5위

 

 

 

이름: 게르트 뮐러
출생일: 1945년 11월 3일
국적: 서독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1969년 최고의 선수 5위에는 적어도 득점력만큼은 전성기 펠레에 버금가는 퍼포먼스를 보인 게르트 뮐러를 선정했다.

분데스리가에서 30경기에 출전해 30골을 득점하며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의 구단 역사상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으며 DFB포칼에서도 소속팀의 우승을 이끌며 리가와 포칼에서 모두 득점왕에 올랐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조국 서독의 1970 멕시코 월드컵 유럽 유럽 예선 7조에서 6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하며 유럽 예선 득점왕 및 남미의 토스탕에 이어 예선 전체 득점 2위에 올랐으며 소속팀에서 공식전 35경기에 출전해 39골을 득점했고 대표팀에서는 A매치 9경기에 출전해 11골을 득점하며 44경기에 출전해 50골을 득점했는데 상술한 활약을 바탕으로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4위

 

 

 

이름: 지안니 리베라
출생일: 1943년 8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소속팀: AC 밀란

 

1969년 최고의 선수 4위에는 1968-69 시즌 유러피언 컵의 마스터 지안니 리베라를 선정했다.

로쏘네리 군단의 공격전개에 전권을 쥔 리베라는 비록 1968-69 시즌에 클럽 공식전 6골로 아쉬운 득점력을 보였지만 유려한 플레이메이킹으로 밀란의 유러피언 컵 및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냈다. 실제로 에스투디안테스 원정에서는 상대의 폭력축구와 관중의 협박으로 인해 심판이 판정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제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3위 브론즈볼

 

 

 

이름: 루이지 리바
출생일: 1944년 11월 7일
국적: 이탈리아
소속팀: 칼리아리 칼치오

 

1969년 브론즈볼에는 칼리아리의 왕이자 아주리의 주포 루이지 리바를 선정했다.

팀 득점의 절반을 책임진 리바는 1968-69 시즌 칼리아리가 리그에서 득점한 41골 중 절반 가량인 20골을 득점하며 팀을 준우승에 올림과 동시에 리그 득점왕에 올랐으며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소속팀의 준우승을 이끌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아주리 군단에서도 주포로 활약한 리바는 이태리가 득점한 10골 중 무려 7골을 기록했는데 웨일스 원정에서는 결승골을, 동독 원정에서는 멀티골을 득점하며 2-2 무승부를, 웨일스와의 홈경기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4-1 대승을 이끌며 조국의 본선 진출에 가장 큰 수훈을 세웠다.
 

 

2위 실버볼

 

 

 

이름: 루이스 아르티메
출생일: 1938년 12월 2일
국적: 아르헨티나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 클루브 나시오날

 

1969년 실버볼에는 1년 동안 두 시즌을 소화했으며 심지어 두 시즌 다 빼어난 활약을 펼친 루이스 아르티메를 선정했다.

상반기에는 파우메이라스에서 활약하며 펠레의 산투스와 치열한 경합을 펼쳤는데 비록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놓쳤으며 펠레와의 득점왕 경쟁에서도 밀려났지만 좋은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아르티메는 돌연 하반기에 전국리그 일정을 함께하지 않고 우루과이의 클루브 나시오날로 이적했는데 나시오날이 하반기인 8월에 정규리그를 시작했기에 거의 풀타임을 소화하며 23경기에 출전해 24골을 득점하는 활약을 펼치며 소속팀 나시오날의 리그 우승을 도왔음은 물론 리그 득점왕을 수상하기도 했다.

브라질 전국리그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일정을 소화하지 않았으며 대표팀에도 나서지 않았기에 활약의 평균점은 지안니 리베라, 루이지 리바, 게르트 뮐러에 비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1년에 두 시즌이라는 살인적인 일정을 치렀음에도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아르티메를 실버볼에 선정했다.

 

 

1위 골든볼

 

 

 

이름: 펠레
출생일: 1940년 10월 23일
국적: 브라질
소속팀: 산투스 FC


1969년 골든볼에는 1969년 11월 19일, 바스쿠 다 가마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직접 처리하며 1000호 골을 달성한 펠레를 선정했다.

1969 시즌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뤄내며 주립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펠레는 산투스에서 공식전 37경기 38골을 기록했으며 그 과정에서 우승 경쟁팀 파우메이라스를 상대로 3-0 대승을 거두었으며 절륜한 찬스 메이킹으로 소속팀의 공격 파트너 에두를 전국리그 득점왕으로 만들었다.

대표팀에서도 토스탕과 파트너십을 구성하며 1970 멕시코 월드컵 남미 예선 2조 6경기에 출전해 6전 전승을 거뒀으며 플레이메이커로 내려가며 2선 밑까지 연계에 신경 썼음에도 토스탕에 이어 팀 내에서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인 6골을 기록했다.

펠레는 1969년 한 해 본인의 통산 1000호골을 포함해 78경기에 출전해 69골을 득점했다.
 

 

상위 10인 外 최고의 축구선수 최종 노미네이트 20인
 

잭 찰튼 (잉글랜드 / 리즈 유나이티드)
칼하인츠 슈넬링어 (서독 / AC 밀란)
엔리코 알베르토시 (이탈리아 / 칼리아리 칼치오)
실비오 마르솔리니 (아르헨티나 / 보카 주니어스)
조니 자일스 (아일랜드 / 리즈 유나이티드)
바비 무어 (잉글랜드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아데미르 다 기아 (브라질 / 파우메이라스)
빌리 브렘너 (스코틀랜드 / 리즈 유나이티드)
엑토르 춤피타스 (페루 / 우니베르시타리오)
오베 킨드발 (스웨덴 / 페예노르트)
볼프강 오베라트 (서독 / FC 쾰른)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브라질 / 산투스 FC)
자이르지뉴 (브라질 / 보타포구)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 (우루과이 / CA 페냐롤)
호베르투 히벨리누 (브라질 / 코린치안스)
드라간 자이치 (유고슬라비아 / 츠르베나 즈베즈다)
블로디미르 문트얀 (소련 / 디나모 키이우)
피에리노 프라티 (이탈리아 / AC 밀란)
흐리스토 보네프 (불가리아 / 로코모티프 플로브디프)
에두 (브라질 / 산투스 FC)
 


2. 토르난테 선정 1969년 최고의 축구감독

 

골든 바통

 

 


이름: 네레오 로코
국적: 이탈리아
소속팀: AC 밀란
주 업적: 1968-69 유러피언 컵 우승 및 1969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이탈리아에 카테나치오와 경기 전 심리전을 유행시킨 두 거장 중 한 명인 네레오 로코를 1969년 최고의 축구감독으로 선정했다.

네레오 로코는 비록 세리에 A에서 3위로 부진했지만 유러피언 컵에서 돌풍의 아약스를 잠재웠음은 물론 인터콘틴네탈컵에서도 상대의 폭력 축구에 굴하지 않고 견고한 축구를 보여주며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실버 바통

 

 


이름: 오스발도 수벨디아
국적: 아르헨티나
소속팀: 에스투디안테스
주 업적: 1969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어려운 여건에서도 에스투디안테스의 남미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수벨디야를 실버 바통으로 선정했다.

에스투디안테스는 얕은 선수층과 사실상 영입이 없는 팀이었기에 리그에서는 호성적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클루브 나시오날과의 결승전에서 두 세트 모두 무실점 승리를 거두며 총합 3-0 대승을 이끌며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를 이뤄내는 업적을 선보였다.

다만 AC 밀란을 상대로는 폭력적인 플레이를 지시했음에도 합산 스코어에서 밀려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승리가 중요하지만 적어도 법의 테두리는 지켜야 한다.
 

 

브론즈 바통

 

 

 

이름: 조크 스타인
국적: 스코를랜드
소속팀: 셀틱 FC
주 업적: 1968-69 스코티시 풋볼 리그 1부 우승, 스코티시 컵 우승, 스코티시 리그컵 우승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하며 양강 체제의 스코틀랜드 풋볼 리그를 독주 체제로 만든 조크 스타인을 브론즈 바통으로 선정했다.

적절한 유스 수급과 최적화된 전술을 앞세워 정규리그에서는 라이벌 레인저스를 승점 5점 차로 앞섰으며 스코티시 컵 결승전에서는 레인저스를 4-0으로 압도했으며 리그컵 결승전에서도 하이버니언을 6-2로 대파하는 등 화끈한 공격축구를 선보였다.
 

 

상위 3인 外 최고의 축구감독 노미네이트

 

이름: 제제 모레이라
국적: 브라질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주 업적: 1969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및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

이름: 미겔 무뇨스
국적: 스페인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주 업적: 1968-69 라리가 우승

이름: 스테판 보즈코프
국적: 불가리아
소속팀: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주 업적: 1970 멕시코 월드컵 유럽 지역예선 8조 1위

이름: 니키타 시모얀
국적: 소련
소속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주 업적: 1969 소련 탑 리그 우승

이름: 돈 레비
국적: 잉글랜드
소속팀: 리즈 유나이티드
주 업적: 1968-69 잉글랜드 풋볼 리그 1부 우승

이름: 지지
국적: 브라질
소속팀: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
주 업적: 1970 멕시코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 1조 1위

이름: 브란코 제베치
국적: 유고슬라비아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주 업적: 1968-69 분데스리가 우승, DFB포칼 우승

 


3. 토르난테 선정 1969년 축구 특별상

 

토르난테 선정 골든 글러브

 

 

 

이름: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
출생일: 1945년 2월 14일
국적: 우루과이
소속팀: CA 페냐롤


야신이 자신의 후계자로 평가한 우루과이의 명수문장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를 1969년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했다.

소속팀 페냐롤에서는 비록 정규리그 우승을 이뤄내진 못했지만 역대 인터콘티넨탈컵 챔피언들 중 남미 팀들이 참가한 인터콘티넨탈컵 슈퍼컵에서는 산투스와 라싱 클루브, 에스투디안테스를 모두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으며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는 1970 멕시코 월드컵 남미 예선 3조에서 전경기 클린시트를 기록하며 조국을 본선에 올렸다.

 

 

토르난테 선정 골든 보이

 

 

 

이름: 에두
출생일: 1949년 8월 6일
국적: 브라질
소속팀: 산투스 FC

 

1969년 최고의 신인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에두를 선정했다.

펠레와 함께 산투스의 공격을 이끄는 에두는 브라질 전국리그 득점왕에 올랐음은 물론 상파울루 주립 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헌했다. 대표팀에서는 자이르지뉴와 치열한 주전경쟁을 했다.

 

 

토르난테 선정 골든 쉴드

 

 

 

이름: 프란츠 베켄바우어
출생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서독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최우수 선수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골든 렌즈

 

 

 

이름: 펠레
출생일: 1940년 10월 23일
국적: 브라질
소속팀: 산투스 FC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최우수 선수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골든 에로우

 

 

 

이름: 루이스 아르티메
출생일: 1938년 12월 2일
국적: 아르헨티나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 클루브 나시오날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최우수 선수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골든 암밴드

 

 

 

이름: 지안니 리베라
출생일: 1943년 8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소속팀: AC 밀란


 

1969년 최고의 주장에게 수상하는 골든 암밴드는 지안니 리베라를 선정했다.

밀란의 주장 리베라는 팀을 아우르며 유럽 챔피언에 올랐음은 물론 에스투디안테스와의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관중의 위협, 그로 인한 심판의 편파판정, 그리고 상대 선수들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도리어 선제골을 터트리는 활약을 펼쳤으며 로쏘네리 군단이 상대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게 잘 독려하며 소속팀을 세계 챔피언으로 올렸다.

 


4. 토르난테 선정 1969 Team Of The Year

 

 

골키퍼

 

 

 

 

이름: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
출생일: 1945년 2월 14일
국적: 우루과이
소속팀: CA 페냐롤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특별상 문단 골든 글러브 항목 참조

 

 

센터백

 

 

 


이름: 엑토르 춤피타스
출생일: 1943년 4월 12일
국적: 페루
소속팀: 우니베르시타리오


오른쪽 센터백에는 비록 키는 작았지만 강력한 투지와 세련된 수비 테크닉 및 패스를 겸비한 완성형 수비수 엑토르 춤피타스를 선정했다.

춤피타스는 소속팀 우니베르시타리오의 페루 리그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대표팀에서도 1970 멕시코 월드컵 남미예선 1조에서도 아르헨티나를 따돌리고 본선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수훈갑을 세워 같은 해에 남미축구연맹이 선정한 남아메리카 최고의 수비수에 선정되었다.

 

 

센터백

 

 

 

 

이름: 잭 찰튼
출생일: 1935년 5월 8일
국적: 잉글랜드
소속팀: 리즈 유나이티드


왼쪽 센터백에는 리즈 유나이티드의 잉글랜드 제패를 도운 수비수 잭 찰튼을 선정했다.

잭 찰튼이 지휘하는 리즈 유나이티드의 수비진은 리그 42경기에서 26실점에 그쳤을 정도로 대단한 수비력을 보였는데 이 중심에는 잭 찰튼의 강력한 수비라인 리딩과 3선으로의 안정적인 볼 배급 능력이 있었다.

 


라이트백

 

 

 

 

이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출생일: 1944년 7월 17일
국적: 브라질
소속팀: 산투스 FC


1969년 최고의 라이트백에는 강렬한 오버래핑과 미드필더 및 측면 공격수와의 우수한 연계 플레이를 선보이며 전 세계에 선선한 충격을 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선정했다.

아우베르투는 산투스의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뤄냈으며 셀레상에서도 수비진의 핵심 선수로 1970 멕시코 월드컵 남미 예선 2조에서 전승을 거두는데 공헌했다.

 

 

레프트백

 

 

 

 

이름: 칼하인츠 슈넬링어
출생일: 1939년 3월 31일
국적: 서독
소속팀: AC 밀란


1969년 최고의 레프트백에는 레프트백과 리베로를 두루 소화하며 밀란의 수비라인을 지휘한 슈넬링어를 선정했다.

슈넬링어가 이끄는 로쏘네리 군단은 비록 리그에서 3위에 그쳤지만 이는 공격진의 기복이 문제였지 수비 지표에서는 30경기 12실점이라는 경악스러운 수비력을 선보였으며 유러피언 컵에서도 셀틱을 상대로 무실점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약스를 상대로도 강력한 수비력을 선보이며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다. 슈넬링어는 디 만샤프트에서도 뛰어난 수비력을 바탕으로 수비라인의 핵을 맡아 조국의 본선 진출에 힘을 보탰다.

 

 

인콘트리스타

 

 

 

 

이름: 프란츠 베켄바우어
출생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서독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최우수 선수 항목 참조
 

 

플레이메이커

 

 

 

 

이름: 지안니 리베라
출생일: 1943년 8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소속팀: AC 밀란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최우수 선수 항목 참조

 

 

라이트윙 포워드

 

 

 

 

이름: 조지 베스트
출생일: 1946년 5월 22일
국적: 북아일랜드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최우수 선수 항목 참조

 

 

레프트윙 포워드

 

 

 

 

이름: 루이지 리바
출생일: 1944년 11월 7일
국적: 이탈리아
소속팀: 칼리아리 칼치오


주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이지만 일부 경기에서 레프트윙으로 출전,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최우수 선수 항목 참조

 

 

센터 포워드

 

 

 

 

이름: 펠레
출생일: 1940년 10월 23일
국적: 브라질
소속팀: 산투스 FC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최우수 선수 항목 참조

 

 

센터 포워드

 

 

 

 

이름: 루이스 아르티메
출생일: 1938년 12월 2일
국적: 아르헨티나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 클루브 나시오날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 레드 아카이브 선정 1969년 최우수 선수 항목 참조

 

 

1969 TOTY 베스트 일레븐

 

 

 

 


5. Red Archive 선정 1969년 세계 최고의 축구팀

 

1위 골든 팀

 

 

 

 

AC 밀란
 

성적: 1968-69 유러피언 컵 우승 및 1969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세리에 A에서는 피오렌티나와 칼리아리에게 밀려 3위라는 아쉬운 순위를 기록했지만 유로피언 컵에서는 셀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약스를 차례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당시 유럽의 새로운 강호로 떠오르고 있던 아약스를 4-1로 대파하는 위엄을 보였다.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를 달성한 에스투디안테스를 만났는데 여기서 에스투디안테스는 이전보다도 더욱 폭력성이 강해진 거친 플레이로 밀란 선수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밀란은 에스투디안테스의 폭력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텼고 결국 홈에서의 3-0 대승에 힘입어 합산 스코어 4-2로 우승을 차지했다. 

 

2위 실버 팀

 

 

 

 

FC 바이에른 뮌헨
 

성적: 1968-69 분데스리가 우승, DFB포칼 우승

분데스리가에서 34경기 18승 10무 6패를 기록하며 2위와 무려 승점 8점 차이로 여유롭게 우승을 차지했다. DFB포칼에서도 함부르크, 뉘른베르크, 샬케라는 쉽지 않은 상대들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우승하고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최초의 더블을 달성했다.

 

 

3위 브론즈 팀

 

 

 

 

셀틱 FC

 

성적: 1968-69 스코티시 풋볼 리그 1부 우승, 스코티시 컵 우승, 스코티시 리그컵 우승

스코틀랜드 리그와 스코티시 컵, 스코티시 리그 컵을 모두 우승하며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했다. 비록 유로피언 컵에서는 8강에서 밀란에게 탈락했지만, 합산 스코어 0-1의 아쉬운 패배였고 상대가 하필 이 시즌 챔피언인 밀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나름 선전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8강까지 진출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지배자 생테티엔과 유고슬라비아의 강호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모두 격파했다는 점을 높게 살 수 있다. 스코티시 컵에서는 결승전에서 라이벌 레인저스를 4-0으로 대파하고, 스코티시 리그 컵에서는 결승전에서 하이버니안을 6-2로 대파하는 등 국내에서는 절대 강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6. 평가자 소개

 

1. 토르난테


해당 블로그의 주인이자 F.C.U의 회장으로 축구역사 매니아, 중부 유럽과 남부 유럽 그리고 동부 유럽 축구에 관심이 많다.

선수와 감독을 평가하는 부분에서 전술적 상징성과 최고점에서의 퍼포먼스를 굉장히 중시하는 성향

응원팀: 바이에른 뮌헨, 인테르 밀란, 디나모 키이우
 

 

 

2. Red Archive


F.C.U의 회원으로 축구역사 매니아, 특히 남미 축구에 관심이 많다.

선수와 감독을 평가하는 부분에서 토르난테에 비해 상징성보다는 어빌리티에서 더 섬세하게 평가하는 성향

응원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CA 인데펜디엔테, 아스날
 

 


7. 축사 및 추도사

 

 

추도사

 

1969년 3월 16일, AS 로마의 스트라이커 줄리아노 타콜라가 칼리아리와의 경기를 앞두고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다가 라커룸에서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말았으며 결국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타콜라의 사망 사건은 여러 정황을 볼 때 구단측으로부터 적절한 관리를 받지 못해 벌어진 인재였던 만큼 앞으로는 구단측에서 선수들을 더 세심하게 관리해야 함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줄리아노 타콜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다른 세상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줄리아노 타콜라 (1944.6.28 ~ 1969.3.16)

 

 

 

 

축사
 

1969년 11월 19일, 펠레는 바스쿠 다 가마와의 경기에서 통산 1000골 달성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습니다.

상대 선수의 파울로 인해 펠레는 페널티킥 기회를 얻었으며 그것을 침착하게 마무리지어 개인 통산 천 번쨰 골의 금자탑을 달성했습니다.

물론 비공식 경기를 포함한 기록이었지만 공식전보다 더 큰 상금이 걸린 비공식전도 많았음으로 이 기록을 그 누구도 폄하할 수 없습니다.

축하합니다. 펠레

 

 

 

통산 1000골을 득점한 펠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은 힘이 됩니다.   

댓글 2

2023.04.07. 22:09
닉 레어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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