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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칼럼 토탈풋볼의 두 거장 - 中[발롱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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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layus.com/107601385

 

 

 

 

3. 에른스트 하펠의 마법

 

에른스트 하펠은 당대 유럽 축구계에서 가장 유망한 감독 중 한 명이었다. 선수 시절 월드클래스의 중앙 수비수였던 하펠은 뛰어난 수비력 못지 않게 공격 가담에 능했으며 특히 전술안과 축구 지능이 매우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감독 커리어 초반으로 추정되는 에른스트 하펠

 

 

그가 지도자로서 첫 발을 내딛은 곳은 네덜란드의 ADO 덴 하흐. 평범한 중소 클럽이었던 ADO는 하펠이 부임하기 직전인 1961-62시즌에 리그 15위로 간신히 강등을 면한 약체였다. 1962-63시즌을 앞두고 ADO에 부임한 하펠은 부임 직후 팀을 중위권에 안착시키고 KNVB컵 결승전에 진출시켰다. 그 다음 시즌에도 KNVB컵 결승전에 진출하며 2시즌 연속 컵 준우승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 다음 시즌인 1964-65시즌에는 무려 리그 3위에 올랐고, 1965-66시즌에는 다시 한 번 KNVB컵 준우승을 차지하며 ADO를 네덜란드의 다크호스 팀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토너먼트에서 강한 감독이라는 하펠의 이미지는 이미 이때부터 형성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1967-68시즌, 다시 한 번 KNVB컵 결승에 진출하였고 미헬스가 이끄는 아약스를 잡아내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KNVB컵 우승을 이뤘다.

 

하펠은 약체로 평가받던 팀에 부임하자마자 의도적인 탱킹 과정 따위는 없이, 곧바로 기대를 뛰어넘는 성적을 내고 지속적인 상향 곡선을 그렸으며 장기적으로 중상위권 이상의 성적을 기대할 수 있는 전력으로 리빌딩했다. 심지어 국내 컵 트로피까지 들어올리며 상승세에 방점을 찍었다. 이러한 실적과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네덜란드 축구계의 No.2 페예노르트로 직장을 옮길 수 있었다.

 

 

1969-70시즌 당시 페예노르트는 네덜란드 최강자 아약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아약스에 버금가는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페예노르트의 탄탄한 전력은 1960년대 후반 아약스의 돌풍을 조금씩 저지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페예노르트도 네덜란드에 유행하던 4-2-4 포메이션을 채택한 팀이었고 이미 네덜란드 축구에 익숙해져있던 하펠도 4-2-4를 잘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하펠은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한다.

 

하펠도 미헬스처럼 유동적이고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토탈풋볼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었다. 이때까지의 미헬스는 포메이션에서 많은 공격 숫자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시했지만 페예노르트에 온 하펠은 달랐다.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지배하길 원했다.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축구가 실현된다면 꼭 스타팅 라인업에 공격수의 수가 많지 않더라도 높은 위치에서 여러 명의 선수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공격수의 수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앙 공격수를 한 명으로 줄이고 미드필더의 수를 늘렸다. 두 명의 미드필더로는 필드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안정적으로 경기를 지배하기 위해 미드필더를 세 명으로 늘린 새로운 포메이션을 개발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쓰이는 4-3-3 포메이션의 탄생이다.

 

 

하펠은 기존의 선수들과 새로 등용한 선수들을 조화시키며 자신의 팀을 빠르게 만들어갔다. 골키퍼에는 1958년부터 페예노르트의 뒷문을 지킨 에디 피터스 그라플란트가 계속해서 주전 수문장으로 기용되었고 자신의 현역 마지막 시즌을 화려하게 불태웠다. 중앙 수비는 리뉘스 이스라엘과 테오 라서롬스가 콤비를 이뤘다. “철의 리뉘스” 이스라엘은 네덜란드 최고의 수비수였으며 기량의 완성도가 매우 높았던 만능 스위퍼였다. 심지어는 사람보다 공간을 막는 것이 더 우선시되는 스위퍼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인 방어 능력마저 최상급이었다. 그런 이스라엘의 짝으로 나선 “탱크” 라서롬스는 그 별명답게 강력한 슬라이딩 태클이 장기였던 스토퍼였다.

 

 

페예노르트 최고의 수비수, 리뉘스 이스라엘

 

 

이 이스라엘-라서롬스 콤비는 미헬스의 아약스에서 중앙 수비를 이룬 바소비치-훌쇼프 콤비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이는 스위퍼와 스토퍼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소위 ‘컴플리트 디펜더’의 존재에서 기인한다. 아약스에서 스위퍼 바소비치의 짝으로 나온 훌쇼프는 수비 시 스토퍼에 가까운 역할이었지만 공격 시 전진 능력과 롱패스 능력도 수준급으로 발휘했던 완성형 센터백이었다. 페예노르트에서는 스위퍼 이스라엘이 최고 수준의 스토퍼 못지 않은 태클과 대인 방어를 갖추어 무결점 수비수로 활약했고 그 파트너인 라서롬스가 고전적인 스토퍼 유형에 가까웠다. 이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수비수의 공격 가담을 특히나 중요하게 봤던 미헬스와 수비 밸런스를 강조했던 하펠의 차이가 드러난다.

 

양쪽 풀백은 측면 수비뿐만아니라 활발한 공격 가담도 요구되었다. 미드필드 인원이 3명이므로 풀백이 중원 싸움에 가담하는 인버티드 무빙은 크게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사이드라인을 따라 오버래핑하는 움직임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라이트백은 1960년대에 꾸준히 주전으로 활약했던 피트 로메인이 그대로 주전으로 뛰었고, 레프트백은 베테랑 코어 펠트호엔이 주전이었으나 하펠 부임 이후에는 아약스에서 영입한 테오 판 다위펜보데를 주전으로 기용했다.

 

 

아약스에서 페예노르트로 이적하며 미헬스와 하펠에게 모두 지도를 받아본 특이한 경력을 갖게 된 테오 판 다위펜보데

 

 

3명의 미드필더들은 마치 오늘날의 3미드필더 체제처럼 역삼각형 형태로 배치되었다.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에는 수비력과 기동력이 뛰어난 빔 얀센이 기용되었고, 전방의 두 중앙 미드필더들은 오늘날의 메짤라처럼 하프스페이스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네덜란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손꼽히는 빌럼 판 하네험과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츠 하질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 두 선수들을 기용한 선택은 모두 하펠의 아이디어였다. 원래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투톱의 한 자리에 처진 공격수로 기용되기도 했던 판 하네험을 중앙 미드필더로 내려서 3미드필더 체제의 중원 사령관 직책을 맡겼다. 그는 엄청난 볼 컨트롤 테크니션이었는데, 훌륭한 탈압박과 시야, 킥을 통해 팀의 플레이메이킹을 책임졌다. 파워와 정확성을 겸비한 중장거리 패스는 아웃사이드 킥이라는 변칙적인 옵션까지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었고 이는 중거리 슛을 통한 득점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또한 태클과 인터셉트를 통한 수비 기여도 높았다. 스피드가 느려 기동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본인의 활동량과 위치 선정, 동료 미드필더들의 커버로 보완했다.

 

 

페예노르트 역사상 최고의 선수, 빌럼 판 하네험

 

 

프란츠 하질은 라피트 빈과 샬케04에서 좋은 활약을 했던 미드필더로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도자 하펠의 눈에 들어 페예노르트로 이적했다. 하펠은 그의 장점 중에서도 전진성과 오프 더 볼 무빙에 집중했다. 하펠은 두 중앙 미드필더 중 한 선수가 다소 정적인 플레이메이커라면 나머지 한 선수는 역동적으로 경기장을 휘젓고 다니도록 했는데 그 적임자가 바로 하질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날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원조 격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하펠은 하질을 조금 더 특이하게 활용했다. 중앙 공격수를 2명에서 1명으로 줄여서 생긴 공백을 하질의 기습적인 전진과 스위칭으로 보완함으로써, 공격수가 줄어들면서 넓어진 최전방 공간을 새롭게 활용하고자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질의 역할은 중앙 미드필더보다는 공격형 미드필더에 더 가까웠다.

 

역삼각형의 아래 꼭짓점에 배치된 빔 얀센은 수비 라인의 앞을 견고하게 보호하며 빌드업에 관여하는 전형적인 홀딩 미드필더의 역할도 수행했지만 토탈풋볼의 팀답게 더 넓은 범위를 뛰어다니며 다른 선수의 전진 또는 스위칭으로 생긴 빈 공간을 커버하는 플레이에도 능했다. 시즌 진행 도중 다른 포지션에 아예 구멍이 생기면 그 포지션으로 출전하기도 하는 등 유틸리티의 자질이 있었다.

 

 

레프트윙에는 판 하네험과 더불어 페예노르트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코엔 물레인이 30대 초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며 측면 공격을 이끌었다. 빠르고 기술적인 드리블 돌파로 상대의 우측면을 괴롭혔으며 특히 상대 라이트백과의 1대1 매치에서는 측면 돌파와 중앙 침투의 2가지 선택지를 통해 수싸움을 유도했다. 이전 세대의 선수였지만 새 감독의 혁신적인 철학을 이해하고 현대적인 윙 포워드의 플레이에 잘 적응했다. 라이트윙 헹크 베리 또한 적절한 커팅 인사이드로 측면과 중앙을 아우르는 공격을 선보였고 중앙 공격수 킨드발과 공격형 미드필더 하질의 연계에도 호응했다.

 

 

노익장을 과시한 윙어, 코엔 물레인

 

 

또한 수비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압박을 통해 첫 번째 저지선을 형성했고 이로 인해 후방의 윙백들도 더 앞선 위치에서 압박에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라이트윙 베리가 이 전방 압박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중앙 공격수로는 스웨덴 출신의 스트라이커 오베 킨드발을 선택했다. 당시 페예노르트에는 오베 킨드발과 뤼트 헤일스라는 두 명의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있었기에 이 중 한 명만을 선발로 기용하는 것은 아까웠을 것이다. 그래도 하펠은 팀 전술을 위해 한 명을 희생하는 것도 감수했고 지난 두 시즌간 에레디비시 득점왕(1968-69시즌에는 디크 판 데이크와 공동 수상)을 연달아 차지한 킨드발을 주전 공격수로 선택했다.

 

 

하펠에게 주전 스트라이커로 선택받은 오베 킨드발

 

 

이 자리는 쓰리톱의 중앙 공격수지만 하펠 감독은 강한 피지컬로 박스 안에서 버티는 타겟터보다는 넓게 돌아다니며 득점 기회를 사냥하고 동료와 연계에 능한 완성형 스트라이커 유형을 원했고, 킨드발은 이에 들어맞는 선수였다. 빠르고 위치 선정에 능한 감각적인 스트라이커로, 득점력이 뛰어났으며 동료와의 연계를 통해 찬스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던 선수다. 헤일스 또한 훗날 아약스에서 리그 득점왕을 4연속으로 수상할만큼 득점력이 뛰어난 선수였으나 이 당시에는 잠재력이 완전히 터지지 않았었다. 발 기술은 킨드발보다 좋았지만 오프 더 볼과 동료와의 연계는 킨드발에 비해 부족했고, 이 때문에 하펠이 원하는 스트라이커에는 비교적 맞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킨드발의 백업으로 많이 출전했다. 이색적인 것은, 이 시즌 주로 백업으로 출장하면서 유로피언 컵 4경기 6골로 슈퍼 서브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펠이 완성한 페예노르트의 베스트11

 

 

이렇게 베스트 멤버를 모두 꾸린 하펠은 끊임없는 훈련과 전술적 사색을 통해 팀을 정상으로 이끌고자 노력했다. 4-3-3 포메이션은 라인을 끌어올려 몰아붙이는 토탈풋볼에 최적화된 포메이션이다. 빌드업 시 삼각형이 많이 형성되어 안정적인 볼 전진이 가능하고,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어 후방 플레이어의 순간적인 오버래핑을 통한 수적 우위 창출과 전방 플레이어들 간의 스위칭에 상당한 이점이 있다. 또한 이러한 공격을 안전하게 시도하기 위해서는 최후방의 오프사이드 라인과 빈틈없는 압박이 필수인데, 이 포메이션은 최후방 라인을 높이 올려서 상대가 공격할 때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좁게 제한하고 이렇게 가둬놓은 공간 속에서 중원의 머릿수를 이용하여 압박하기에 유리했다.

 

 

여기서 스위칭을 활용한 공격 상황에서의 토탈 플레이는 다뉴브 학파의 고장 오스트리아에서 축구를 해온 하펠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비 상황에서의 토탈 플레이, 압박과 오프사이드 트랩은 하펠이 어떻게 적용했을까? 이것은 능동적 축구를 발전시켜온 중유럽의 기존 올드스쿨 지도자들에게 익숙한 영역은 아니다. 다뉴브의 철학을 계승하고 여러 가지 다른 아이디어들을 습득하여 자신만의 결과물을 창조하고자 했던 하펠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하펠은 선수 시절에 감독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전술에 대해 토론하는 등 배움에 대한 열정이 아주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가 사람과의 대화를 그리 즐기지 않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축구에 있어서는 얼마나 탐구 의욕이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라피트 빈에서 활약하던 시절, 라피트 빈은 높은 라인과 공격적인 축구로 재미를 봤었다. 그러나 1949년 “승리행 급행열차”라고 불리던 브라질의 최강자 바스쿠 다 가마와 경기를 했을 때는 오히려 5-0으로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바스쿠 다 가마는 아데미르, 치쿠, 프리아사 등 브라질을 대표하는 공격수들이 모여있었고 자유로운 포지셔닝을 강조한 플라비우 코스타 감독(훗날 브라질에서 4-2-4 포메이션을 실험한다.)의 공격적인 전술 하에서 대단한 화력을 자랑하는 팀이었다.

 

 

브라질 축구의 대부, 플라비우 코스타

 

 

이 날도 어김없이, 아니 평소보다 더 하펠과 감독 사이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한스 페서 감독과 하펠은 브라질 팀들의 공격 방식인 ‘자유로운 포지셔닝’과 ‘적극적인 공격 가담’으로 대표되는 소위 “브라질리언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고, 마찬가지로 브라질리언 시스템을 사용하는 팀을 상대할 때의 대비책으로, 많은 수의 공격수들이 수비에 혼란을 줄 때의 대량 실점 위험을 막기 위하여 오프사이드 트랩을 도입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 때의 라피트 빈이 얼마나 발전된 오프사이드 트랩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하펠이 현역 선수 시절부터 오프사이드 트랩에 대한 아이디어를 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프사이드 트랩은 축구 역사 초창기부터 오프사이드 룰과 함께 존재해왔다. ‘함정’이라는 단어가 붙은 시점과는 별개로. 최후방 수비 라인을 일자로 가지런히 정렬하여 상대방의 최전방 공격수가 배후로 침투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가장 큰 위험 요소 중 하나를 상당히 제거할 수 있기에 이런 ‘견제’의 수준에서의 오프사이드 트랩은 필수였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트랩을 ‘작동’시킨다고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것은 하펠, 미헬스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아르헨티나의 오스발도 수벨디아 감독에 의해 적극적으로 개발되었고 이 또한 토탈풋볼 시대의 거대한 진보 중 하나이다. 이 오프사이드 ‘트랩’이 보편적으로 퍼지기까지는 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여러 지역의 축구가 국제적으로 교류하는 길이 넓어지고, 다양한 철학들이 토탈풋볼이라는 밑바탕 위에 한데 어우러지고 나서야 대중화가 될 수 있었다.

 

하펠이 선수 시절 오프사이드 트랩의 영감을 얻었을 때부터 감독 시절 4-3-3 포메이션을 고안할 때까지의 시간은 오프사이드 트랩이 원시적인 ‘견제’의 개념에서 현대적인 ‘함정 작동’의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중심에 있다. 하펠이 자신의 토탈풋볼에 오프사이드 트랩을 이용한 것은, 상대 공격수의 침투를 견제하는 기존의 용도를 확장한 것으로, 오프사이드 트랩이라는 장치를 적극 믿고 최후방 라인을 더욱 끌어올려 상대방이 활용할 공간을 축소하고자 한 것이다. 상대를 견제하는 수단이 아닌, 상대를 제한하는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수벨디아에 의해서는 상대를 잡아먹고, 집어삼키는 사냥의 도구로 무시무시하게 개조된다.)

 

그런 하펠에게 오프사이드 트랩은 압박과 직결된다. 압박이라는 행위는 아주 오래된 과거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에 ‘압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전술의 한 테마로 중요하게 다룬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압박의 발전은 이 글에서 다루는 범위를 벗어나기에 간략히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지만, 그 중심에 있는 빅토르 마슬로프라는 인물의 이름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펠의 라피트 빈이 소비에트 연방으로 투어를 떠났을 때의 일이다. 그때 압박 축구의 선구자인 빅토르 마슬로프 감독을 만났다. 오스트리아의 ‘능동적 축구’와 같은 목표를 지향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중점은 달랐던 소비에트 연방의 ‘집단주의 축구’를 대표하는 마슬로프 감독은 상대에게서 시간과 공간을 뺏어 우위에 서기를 원했으며 강한 압박 전술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던 인물이다. 상대방에 대해 연구하기를 즐겼던 하펠의 특성 상, 아마도 그는 이때 압박에 대한 아이디어를 흡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비에트 집단주의 축구의 선구자, 빅토르 마슬로프

 

 

물론 하펠이 저런 전술의 영감을 어디서 보고 생각해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펠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이나 글로 거의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펠이 다양한 관점의 접근을 토대로 토탈풋볼의 한 형태를 완성했다는 것은 비록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분명한 사실이고, 그 과정에서 그의 선수 시절의 다양한 경험이 그에게 영감을 제공해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시 하펠의 페예노르트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하펠의 팀은 KR 레이캬비크, AC 밀란, 포르베르츠 베를린, 레기아 바르샤바를 꺾고 유로피언 컵 결승에 진출헀다. 결승전 상대는 스코틀랜드의 최강자이자 1966-67시즌 유럽 축구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한 셀틱이었다. 셀틱은 바젤, 벤피카, 피오렌티나, 리즈 유나이티드를 꺾고 올라왔는데 이들은 페예노르트가 상대한 팀들보다 전력의 편차가 적었다. 팀의 전력, 유럽 대항전 경험, 결승 진출 과정을 모두 보았을 때 셀틱은 페예노르트에게 쉽지 않은 상대였음이 분명하다.

 

경기는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준 페예노르트가 주도했다. 그러나 선제골은 강한 슈팅이 장기였던 셀틱의 레프트백 토미 게멜이 전반 30분에 득점했다. 페예노르트는 32분에 리뉘스 이스라엘의 헤더로 동점골을 득점했으나, 더 이상의 득실은 없었고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 후반 막판, 셀틱의 페널티 박스 안으로 날아온 공을 셀틱의 주장 빌리 맥닐이 애매하게 걷어냈고, 이를 오베 킨드발이 감각적으로 달려들어 골키퍼를 넘기는 칩샷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연장전 117분에 터진 이 극장 결승골로 페예노르트가 유럽의 챔피언이 된다.

 

유럽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인터콘티넨탈 컵은 남아메리카의 챔피언 에스투디안테스와의 대결이었다. 오스발도 수벨디아 감독은 마치 앞서 언급한 마슬로프 감독처럼 집단주의 축구 성향의 지도자였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전략적 파울과 오프사이드 트랩을 도입했고, 전반적으로 매우 거친 플레이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을 지시했다. 또한 상대 팀의 스타일을 조사하고 미리 대비책을 짜는 맞춤전술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런 면밀함은 하펠과 닮은 점이 있었다. 수벨디아 또한 유럽과 남아메리카를 가리지 않고 여러 혁신이 발생한 이 르네상스와 같은 시대의 한 주인공으로서, 합당한 찬사를 받아야할 인물이고 다음 기회에 집중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다.

 

 

축구계의 다크 나이트, 오스발도 수벨디아

 

 

그래서 이 맞대결은 전술적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경기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1차전은 에스투디안테스가 빠르게 2골을 먼저 득점했으나 판 하네험과 킨드발이 각각 추격골과 동점골을 득점하며 2-2 무승부로 끝났다. 네덜란드에서 열린 2차전은 0-0으로 팽팽하게 흘러갔으나, 교체 투입한 수비수 요프 판 달러의 결승골로 페예노르트가 1-0 승리를 거둔다.

 

여기서 하펠의 승부사 기질을 엿볼 수 있는데, 후반전에 공격적인 미드필더 프란츠 하질과 레프트윙 코엔 물레인을 빼고 수비수인 요한 보스캄프와 요프 판 달러를 교체 투입하는 강수를 두었고 그것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보통 비기고 있을 때에는 공격수를 넣기 마련인데, 하펠은 수비수를 둘이나 넣으며 안정성을 강화했고 상대에게 예상 밖의 수를 선사함으로써 수싸움에서 이기고자 했다. 물론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는 토탈풋볼답게 이 선수들이 단순히 수비만 하지는 않았고 기습적인 공격 가담으로 상대에게 혼란을 배가시켰다. 그 결과 교체 투입한 수비수가 결승골을 득점하는 짜릿한 결말을 이끌어냈다.

 

 

승부사, 마법사, 축구의 신

 

 

이렇게 전 세계에 네덜란드 축구의 부흥을 알리고 세계 챔피언이 된 페예노르트지만, 자국에서는 아약스에게 왕관을 내줬다. 장기전인 리그에서는 선수층이 두껍고 선수들의 수준이 더 높은 아약스가 유리할 수밖에 없기에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또한 지난 시즌을 무관으로 마감한 아약스는 이 시즌에 유로피언 컵에 나가지 않았으므로 일정 면에서도 페예노르트보다 유리했다. 이 시즌 아약스는 리그 34경기에서 27승 100득점을 기록하는 괴물 같은 페이스를 보였다.

 

그렇게 리그와 KNVB컵을 동시에 제패하며 또 한 번 더블을 달성한 아약스였지만 유일하게 참가한 유럽 대항전인 인터-시티스 페어스 컵에서는 준결승에서 아스날에게 탈락하였고 무엇보다도 라이벌 페예노르트가 자신들보다 먼저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미헬스는 당연히 여기에 만족할 리 없었고 그저 지켜만 보고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다. 미헬스가 다시 한 번 변화를 선택한 것이다. 

 

 

 

 

블로그 원문 

https://red-archive.tistory.com/51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은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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