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설정

축구칼럼 1970년대 수상 총 결산[발롱도르~]

안녕하세요, 축구 역사 매니아 레드 아카이브입니다. 

 

이번에 저와 같은 축구 역사 매니아이자 축구 블로거이신 토르난테님과 함께 대형 프로젝트를 합동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희가 속한 크리에이터 팀, FCU의 이름을 걸고 연도별로 가상의 상을 시상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오늘날처럼 연도별 최고의 자리에게 주는 상이 많지 않았으며, 상이 있어도 당시에 상을 받은 선수들의 명예와 인지도가 오늘날까지 잘 이어져오지 않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수상 결과에 대한 반론의 여지가 있어도 이를 재평가한 자료가 적어서 '과거에는 누가 최고였는가'와 같은 주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축구 역사를 연 단위로 끊어서 최고의 자리에 대해 재평가를 진행하고, 여러 부문에서 최고를 직접 선정해보기로 하였습니다. 

 

평가 부문은 연도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감독, 특별상(최고의 골키퍼, 최고의 유망주, 최고의 수비형 플레이어,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최고의 공격수, 최고의 주장),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최고의 팀이며 최상위권의 순위와 후보 노미네이트까지 진행합니다. 

 

시작은 1950년부터이며, 하는 김에 2022년까지 쭉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 뒤에는 더 이전 시대에도 동일한 평가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물론 저희 평가자 2인의 주관(축구를 보는 관점, 스타일에 대한 선호도 등)이 반영되었으며 각 평가자의 성향은 글 하단에 간략히 적어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각자의 주관에 맞게 스스로 평가해보시면 분명히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저희도 그러한 의견 교환을 바라고 있습니다. 

 

연도별 최고의 선수는 두 평가자가 합동으로 평가하였고, 최고의 감독, 특별상,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은 토르난테님께서 맡아주셨고 최고의 팀은 제가 맡아서 선정하였습니다. 

 

또한 설명을 비롯한 아래의 본문은 토르난테님께서 작성하셨고 서문과 공유는 제가 전담하였습니다. 

 

그럼 즐거운 감상과 소통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1970년대가 마무리된 기념으로 1970년대 수상의 총 결산을 진행해보겠습니다. 

 

 

블로그 원문 

https://dongneazesoccer.tistory.com/m/492

 

---- 

 

주의사항
 

1. 이 프로젝트는 티스토리 블로거이자 풋볼 크리에이터 연합(약칭 FCU) 소속 크리에이터 토르난테와 Red Archive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컨텐츠입니다.

2. 선정기간의 기준은 추춘제 리그의 경우에는 1959-60 시즌부터 1968-69 시즌을 기준으로, 춘추제 리그의 경우에는 1960 시즌부터 1969 시즌까지로 잡았으며 1960년 1월 1일부터 1969년 12월 31일까지 열린 국제대회를 모두 포함했습니다.

3. 포인트 합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초 노미네이트 50인 선정- 1p 추가
최종 노미네이트 30인 선정- 1p 추가
토르난테 선정 TOTY 선정- 1p 추가 

올해의 선수 10위 선정- 1.5p 추가
올해의 선수 9위 선정- 2p 추가
올해의 선수 8위 선정- 3p 추가
올해의 선수 7위 선정- 4p 추가
올해의 선수 6위 선정- 5p 추가
올해의 선수 5위 선정- 6p 추가
올해의 선수 4위 선정- 7p 추가
브론즈볼 선정- 9p 추가
실버볼 선정- 10p 추가
골든볼 선정- 12p 추가

*특별상 부문은 추가 점수 없음

즉 골든볼에 선정하면 앞 최초 노미네이트, 최종 노미네이트, TOTY는 무조건 선정되기에 최대 15포인트를 받는데 이게 한 해 만점.

3-2. 감독

골든 바통- 10p 추가
실버 바통- 6p 추가
브론즈 바통- 3p 추가
노미네이트- 1p 추가

3-3. TOTD 선정 방식

모든 부문은 상술한 포인트 부분을 따릅니다.

골키퍼-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센터백- 최고 득점자 2명 선정

사이드백- 라이트백과 레프트백 부문 각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단 양측면으로 분류된 선수는 좌우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지만 한쪽 측면으로 고정된 선수의 경우에는 해당 측면에서만 선정할 수 있습니다.

수비형 미드필더-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공격형 미드필더- 최고 득점자 2명 선정

포워드- 최고 득점자 3명 선정

감독- 최고 득점자 1명 선정

3.4 플레티넘 보이 및 플레티넘 암밴드 선정 방식

골든 보이 수상자 10명 중 신인상 수상 해에 퍼포먼스가 가장 뛰어난 선수 한 명에게만 수상합니다.

4. 이번 랭킹의 선정 기준은 특별상과 최고의 국가대표팀 부문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포인트 합산으로 선정합니다.

5. 건조폼 사진 출처는 플레이어스에서 주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입니다.

 


1. Red Archive 선정 1970년대 세계 최고의 축구팀

 

1위 플래티넘 클럽팀

 

 

 

 

AFC 아약스
 

업적

에레데비시: 5회 우승 (1969–70, 1971–72, 1972–73, 1976–77, 1978–79)
KNVB 컵: 4회 우승 (1969–70, 1970–71, 1971–72, 1978–79)
유러피언 컵: 3회 우승 (1970–71, 1971–72, 1972–73)
UEFA 슈퍼컵 공삭: 1회 우승 (1973)
UEFA 슈퍼컵 비공식: 1회 우승 (1972)
인터콘티넨탈컵: 1회 우승 (1972)

1970년대 최고의 클럽 팀으로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왕조 중 하나로 불리는 "글로리아 아약스" 아약스를 선정했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10년 동안 5번의 에레디비시 우승, 4번의 KNVB 컵 우승, 3번의 유로피언 컵 우승, 1번의 비공식 경기를 포함한 2번의 유로피언 슈퍼컵 우승이라는 무시무시한 업적을 달성했다. 특히 3번의 유로피언 컵 우승은 역사에 몇 없는 3연패이며, 그중 1번은 리그와 국내 컵까지 동시에 제패한 트레블이다. 트레블과 3연패를 동시에 달성한 유럽 팀은 전무후무하다.

요한 크라위프, 요한 네이스컨스, 피트 케이저르, 뤼트 크롤, 스야크 스바르트, 요니 레프, 빔 쉬르비어, 아리 한, 뤼트 헤일스 등의 슈퍼스타들과 리뉘스 미헬스, 슈테판 코바치 등의 명장들이 아약스에서 한 시대를 수놓았다.

특히 미헬스 감독과 크라위프의 위대한 합작인 "토탈풋볼"은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매우 강력한 위력을 냈을 뿐만 아니라 축구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 이후의 전술들은 모두 토탈풋볼의 영향권 안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아약스가 위대한 이유다.

 

1위 플래티넘 국가대표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업적

1970 멕시코 월드컵 3위
1972 UEFA 유로 우승
1974 서독 월드컵 우승
1976 UEFA 유로 준우승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8강

 

1970년대 내내 꾸준하게 강자의 면모를 보여준 서독을 최고의 국가대표팀으로 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기집권 감독 헬무트 쇤의 지도 하에 서독은 프란츠 베켄바우어, 게르트 뮐러, 베르티 포그츠, 귄터 네처, 제프 마이어, 파울 브라이트너 등의 전 포지션에 걸친 에이스들과 탄탄한 선수층, 그리고 상황에 맞게 팀의 색깔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쇤 감독의 전술적 역량을 앞세워 1970년대를 지배했다.

1970년 월드컵에서 3위를 기록하며 준수하게 10년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유로 1972와 1974년 월드컵을 연달아 우승하며 최고조를 찍었고 유로 1976에서도 결승전에 오르며 메이저 대회 3연속 결승전 진출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결과 못지않게 과정과 미학적 성취도 훌륭하였다. 그동안 최고의 미드필더였던 베켄바우어에게 리베로 롤을 맡기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으며, 유로 1972에서는 귄터 네처를 주축 플레이메이커로 하여 일명 람바참바 풋볼로 불리는 화려한 공격 축구를 선보였고, 1974년 월드컵에서는 네덜란드의 토탈풋볼에 대항하여 조직력과 수비 축구에 무게를 실었으며 베르티 포그츠를 크라위프의 마크맨으로 붙이는 등의 수싸움을 통해 우승을 얻어냈다.

 


2. 토르난테 선정 1970s Team Of The Decade

 

 

골키퍼

 

 

 

 

이름: 우발도 피욜
출생일: 1950년 7월 21일
국적: 아르헨티나
평가 기간 소속팀: 킬메스, 라싱 클루브, 리버 플레이트

 

디노 조프와 치열한 경쟁 끝에 1포인트 앞선 아르헨티나의 우발도 피욜이 1970년대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되었다.

킬메스와 라싱 클루브를 거쳐 리버 플레이트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메트로폴리타노 3회 우승과 나시오날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조국을 대표해 골문을 지키며 엄청난 활약을 펼쳐 우승에 공헌했다.

우발도 피욜은 1977년에는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FCU 어워즈가 선정한 골든 글러브를 2회 수상했다.

 

 

1970년대 최고의 골키퍼 선정 결과

 

 

 

 

 

센터백

 

 

 

 

이름: 프란츠 베켄바우어
출생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서독
평가 기간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뉴욕 코스모스


1960년대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정되었던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리베로로 포지션을 변경한 뒤 자유인의 진수를 보여주며 수비라인을 넘어 전 경기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리베로의 의미를 한층 확장시키며 서독과 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누렸다.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뤄내며 바이에른 뮌헨이 빅이어 영구소장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고 서독 대표팀에서는 메이저 대회 3회 연속 결승에 진출해 UEFA 유로 1972와 1974 서독 월드컵에서 주장으로 우승을 이뤄냈다. 1970 멕시코 월드컵부터 유로 1976까지 모든 대회에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 건 덤이다.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1972년과 1976년에 FCU 어워즈가 선정한 세계 올해의 선수 골든볼에 선정되었다.
 

 

센터백

 

 

 


이름: 엘리아스 피게로아
출생일: 1946년 10월 25일 
국적: 칠레
평가 기간 소속팀: CA 페냐롤, SC 인테르나시오나우, CD 팔레스티노


1970년대 유럽 무대 최고의 수비수가 프란츠 베켄바우어라면 남미 무대 최고의 수비수는 압도적인 피지컬과 명민한 지능, 그리고 완벽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남미 무대를 평정한 영리하고 용맹한 수비수 엘리아스 피게로아를 뽑지 않을 수 없었다.

피게로아는 특히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캄페오나투 가우초 5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75년과 1976년에는 전국리그인 브라질 세리 A 2연패를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브라질 전국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선정되었고 1976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MVP를 수상했다.

칠레 대표팀에서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진 못했지만 피게로아 개인은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1975년에는 FCU 어워즈가 선정한 세계 올해의 선수 골든볼에 선정되었다.
 

 

1970년대 최고의 센터백 선정 결과

 

 

루이스 페헤이라와 아틸리오 안체타는 포인트가 동률이라 작성자가 더 낫다 판단되는 선수를 직접 선택했다.

 

 


라이트백

 

 

 

 

이름: 베르티 포그츠
출생일: 1946년 12월 30일
국적: 서독
평가 기간 소속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그 누구도 전승을 거둔 네덜란드가 우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독의 사냥개 베르디 포그츠는 요한 크루이프를 완벽하게 지워버리며 조국 서독의 월드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분데스리가 3연패와 서독의 1974 서독 월드컵 및 유로 1976 우승에 크게 기여한 베르티 포그츠는 FCU 어워즈가 선정한 세계 올해의 선수 TOTY 라이트백 부문에 5회 선정되며 꾸준하게 고점을 유지하는 활약을 보여주며 짧지만 강렬한 전성기를 누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제치고 1970년대를 대표하는 라이트백으로 올라섰다.

 


레프트백

 

 

 


이름: 뤼트 크롤
출생일: 1949년 3월 24일
국적: 네덜란드
평가 기간 소속팀: AFC 아약스


1970년대 초중반을 대표하는 레프트백이자 197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리베로 뤼트 크롤이 파울 브라이트너를 근소하게 제치고 선정되었다.

우수한 킥력과 높은 전술안을 바탕으로 네덜란드와 아약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1971-72 시즌 아약스의 트레블에 공헌하 부분을 포함해 에레데비시 5회 우승, KNVB컵 4회 우승,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뤄내며 아약스 구단의 빅이어 영구소장에 공헌했으며 네덜란드 대표팀에서도 두 번의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뤼트 크롤은 FCU 어워즈 선정 TOTY에서 1973년과 1976년에는 레프트백 부문에서 선정되었고 1978년과 1979년에는 센터백 부문에서 선정되었다.

 

 

1970년대 최고의 좌우 사이드백 선정 결과

 

 

 

 

 

수비형 미드필더

 

 

 

 

이름: 호베르투 파우캉
출생일: 1953년 10월 16일
국적: 브라질
평가 기간 소속팀: SC 인테르나시오나우


엘리아스 피게로아와 함께 인테르나시오나우의 약진을 이끈 호베르투 파우캉은 드넓은 시야, 정확한 패스와 명민한 플레이메이킹, 지능적인 수비, 효율적인 공격가담과 완벽한 지구력을 겸비한 완벽한 미드필더였다.

인테르나시오나우의 중원을 이끈 파우캉은 캄페오나투 가우슈 5회 우승, 브라질세리 A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1978년과 1979년에는 브라질 세리 A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으며 1976년부터 대표팀에도 소집되었으나 부상 이슈로 인해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아쉽게도 참가하지 못했다.

호베르투 파우캉은 FCU 어워즈 선정 TOTY에서 수비형 미드필더 부문에 2회 선정되었으며 1979년에는 FCU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실버볼을 수상했다.

 

 

1970년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선정 결과

 

 

 

 

 

공격형 미드필더

 

 

 

 

이름: 지쿠
출생일: 1953년 3월 3일
국적: 브라질
평가 기간 소속팀: 플라멩구

 

브라질 축구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펠레가 브라질 무대를 떠났다. 하지만 브라질 팬들은 여전히 축구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화려한 드리블과 드넓은 시야, 창의적인 패스와 화려하면서도 실속 있는 킥력을 모두 겸비한 플레이메이커 지쿠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플라멩구의 에이스 지쿠는 브라질 전통의 양대 주립리그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5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지쿠 개인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을 4회 수상했다. 전국리그에서도 플라멩구는 우승을 이뤄내지 못했지만 지쿠 개인은 브라질 전국리그 베스트 일레븐 5회 선정에 1974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MVP를 수상했다.

지쿠는 비록 FCU 어워즈에서 아직까지 골든볼을 수상하진 못했지만 FCU 어워즈 플레이메이커 부분에 5회 선정되었으며 1977년에는 세계 올해의 선수 실버볼을 수상했다.

 

 

공격형 미드필더

 

 

 


이름: 펠레
출생일: 1940년 10월 23일
국적: 브라질
평가 기간 소속팀: 산투스 FC, 뉴욕 코스모스


1960년대 플레티넘볼을 압도적으로 수상했던 펠레가 1970년대 초반에도 클래스를 보여주며 1970년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두 자리 중 하나를 차지했다.

펠레는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세 번째 우승을 이뤄내며 줄리메 컵을 영구소장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여러 친선경기와 혹사라 불리는 일정 속에서도 1973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 및 득점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보였다.

상술한 활약으로 펠레는 1970년 FCU 어워즈 세계 올해의 선수상 골든볼을 수상했고, 1973년에는 실버볼을 수상했다.

 

 

1970년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선정 결과

 

 

 

 

 

포워드

 

 

 


이름: 케빈 키건
출생일: 1951년 2월 14일
국적: 잉글랜드
평가 기간 소속팀: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리버풀, 함부르크 SV

 

1970년대 잉글랜드 무대에서 가장 잘 나간 팀은 리버풀이었으며 70년대 후반, 바이에른과 묀헨글라트바흐의 시대가 지자 유럽 최강의 리그 분데스리가의 지배자로 올라선 클럽은 함부르크였다. 그리고 그 두 팀의 공통점은 모두 키건을 품었던 팀이란 것이다.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에서 데뷔한 케빈 키건은 리버출로 이적해 여섯 시즌을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풋볼 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6-77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다. 서독의 함부르크에서도 1978-79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케빈 키건은 FCU 어워즈가 선정한 TOTY 포워드 부문에 4회 선정되었으며 1977년에 FCU 어워즈 세계 올해의 선수 골든볼을 수상했다.

 

 

 

포워드

 

 

 

 

이름: 게르트 뮐러
출생일: 1945년 11월 3일
국적: 서독
평가 기간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


1960년대를 대표했던 골잡이가 펠레였다면 1970년대를 대표한 골잡이는 역시 평가 기간 동안 아홉 시즌 연속 30골을 넘게 득점한 게르트 뮐러를 선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켄바우어와 함께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뤄내며 바이에른 뮌헨이 빅이어 영구소장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고 서독 대표팀에서는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10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UEFA 유로 1972에서는 팀이 본선에서 득점한 5골 중 4골을 득점하며 우승과 득점왕을 동시에 참가했으며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결승전에 득점하며 우승에 공헌했다. 그가 빠진 유로 1976에서는 서독 대표팀이 결승전을 넘지 못했다.

득점왕 타이틀만 셀 수도 없이 많이 탄 게르트 뮐러는 FCU 어워즈가 선정한 TOTY 포워드 부문에 4회 선정되었으며 1970년에 FCU 어워즈 세계 올해의 선수 실버볼을 수상했다.

 

 

포워드

 

 

 

 

이름: 요한 크루이프
출생일: 1947년 4월 25일
국적: 네덜란드
평가 기간 소속팀: AFC 아약스, FC 바르셀로나,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

 

토털 풋볼의 페르소나이자 최고의 야전 사령관 크루이프는 고점에서 보여준 능력은 1970년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약스에서 1971-72 시즌 트레블과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뤄내며 구단에 빅이어 영구 소유권을 선물한 요한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에서도 첫 시즌에 14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네덜란드 대표팀에서는 1974 서독 월드컵떄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으나 결승전에서 베르티 포그츠에 막혀서 우승을 서독에게 내줬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아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대회 내내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대회 MVP로 평가받았다.

 

 

1970년대 최고의 포워드 선정 결과

 

 

 

 

 

1970s TOTD 베스트 일레븐

 

 

 

 

 

1970s TOTD 세컨드 일레븐

 

 

 

 


3. 토르난테 선정 1960년대 축구 특별상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글러브

 

 

 

이름: 우발도 피욜
출생일: 1950년 7월 21일
국적: 아르헨티나
평가 기간 소속팀: 킬메스, 라싱 클루브, 리버 플레이트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7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보이

 

 

 

이름: 디에고 마라도나
출생일: 1960년 10월 30일
국적: 아르헨티나
평가 기간 소속팀: 아르헨티노 주니오스


1978년 수상자 마라도나를 최고의 수상자로 선정했다. 비록 월드컵에 나선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낙마했지만 아르헨티노 주니오스에서 35경기에 출전해 26골을 득점하는 괴력을 선보인 미드필더 마라도나는 전력이 약한 소속팀을 전기리그 5위에 올리는 대단한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쉴드

 

 

 

이름: 프란츠 베켄바우어
출생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서독
평가 기간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뉴욕 코스모스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7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렌즈

 

 

 

이름: 요한 크루이프
출생일: 1947년 4월 25일
국적: 네덜란드
평가 기간 소속팀: AFC 아약스, FC 바르셀로나,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6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에로우

 

 

 

 

이름: 게르트 뮐러
출생일: 1945년 11월 3일
국적: 서독
평가 기간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7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토르난테 선정 플래티넘 암밴드

 

 

 

이름: 프란츠 베켄바우어
출생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서독
평가 기간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뉴욕 코스모스


축구사 최고의 주장이라 부를 수 있는 프란츠 베켄바우어를 먼저 선정했다.

바이에른 뮌헨과 서독 대표팀의 주장직을 역임한 베켄바우어는 바이에른에서는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뤄내며 아약스와 함께 1970년대 초중반 유럽 무대의 패권을 양분했으며 서독 대표팀에서는 유로 1972 우승, 1974 서독 월드컵 우승 및 유로 1976 준우승을 이뤄내며 일명 메이저 대회 3회 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해 앙리 들로네와 FIFA 월드컵을 동시에 들어 올렸다.

특히 서독 대표팀에서는  바이에른의 선수들과 우승 경쟁 라이벌 구단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선수들을 잘 융합시킨 공을 세웠으며 묀헨글라트바흐 출신의 베르디 포그츠와 라이너 본호프는 서독 대표팀의 우승 과정에서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이는 라이벌 네덜란드의 주장 크루이프가 아약스의 라이벌인 PSV 에인트호번 출신의 선수들을 배척한 것과 반대되었으며 이 둘의 승부는 여기서 갈렸다. PSV의 명 골키퍼 얀 반 베버렌이 있었다면 서독을 상대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이미 그는 배척당한 뒤였다. 이런 포용력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차이를 만든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골든 암밴드를 수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로상

 

 

 

이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생몰년도: 1895년 6월 8일~1978년 6월 2일
국적: 스페인

 

지난 1978년 6월 2일에 작고한 故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회장으로만 레알 마드리드에서 35년간 재직했으며 선수와 감독, 이사를 모두 포함하면 63년을 재직하며 일생을 레알 마드리드에 바쳤다.

선수 시절 10회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고인은 레알 마드리드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축구팀에 한정해서만 라리가 16회 우승, 코파 델 레이 6회 우승 및 유러피언 컵 6회 우승과 라틴컵 2회 우승 등, 총 32회의 우승을 이뤄내며 레알 마드리드를 축구계를 대표하는 명문으로 성장시키며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이에 FCU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구단 회장인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업적 앞에 특별상의 영광을 바친다.

 

 

공로상

 

 

 

이름: 켄 아스톤
출생일: 1915년 9월 1일
국적: 잉글랜드

 

1962 칠레 월드컵과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주심과 선수들의 의사소통 문제로 혼란을 겪은 바가 있었다.

이에 아스톤은 길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간결한 수신호로 쉽게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표현을 하기 위해 경고의 의미의 옐로카드와 퇴장을 의미하는 레드카드를 개발했으며 판정 문제에서 과거에 비해 나아질 수 있었다.

심판의 올바른 판정과 이에 대한 의사소통은 축구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이런 제도를 도입해 판정 및 경기의 질을 올려준 아스톤 주심에게 특별상을 수상한다.

 

 

공로상: 스포츠맨십상

 

 

 

이름: 오스발도 도밍게스 딥
출생일: 1940년 8월 5일
국적: 파라과이

 

파라과이의 명문 클루브 올림피아의 회장인 오스발도 도밍게스 딥은 파라과이 클럽 역사상 첫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끄는 과정에서 쿠비야 감독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인물이다.

대단한 스포츠맨십을 가진 오스발도 도밍게스 딥 회장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에서 보카 주니어스의 회장이 1차전에서 패배한 이후 2차전을 앞두고 3차전까지 승부를 끌고 가기 위해 승부 조작을 제의하였지만 "영광은 값을 매길 수 없다"라는 명언과 함께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FCU 어워즈는 오스발도 도밍게스 딥 회장의 스포츠맨십을 높게 평가해 그에게 스포츠맨십상을 수상한다.

 

 

공로상: 축구 외교관상

 

 

 

이름: 펠레
출생일: 1940년 10월 23일
국적: 브라질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브라질이 줄리메 컵을 영원히 소유하는데 공을 세운 펠레는 1974 시즌이 끝나고 산투스를 떠나 잠재적으로 가장 큰 시장이 될 수 있는 미국 진출의 길을 열었다.

펠레가 미국으로 떠나자 베켄바우어, 요한 크루이프, 게르트 뮐러, 조지 베스트,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키날리아 등 여러 전설적인 선수들이 유럽 무대에서 북미 무대로 진출해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도 잠재적으로 시장이 열릴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 중심에 펠레가 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축구의 영역을 더 넓히며 축구 홍보대사로서 공을 세운 펠레에게 이 상을 수여한다.

 

 


4. 토르난테 선정 1970년대 최고의 축구감독

 

 

1970년대 최고의 축구감독 선정 결과

 

 

 

 

 

토르난테 선정 1970년대 플래티넘 바통

 

 


이름: 에른스트 하펠
국적: 오스트리아
평가 기간 소속팀: 페예노르트, 세비야, 클뤼프 브뤼허,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KRC 하럴버커, 스탕다르 리에주

 

업적

페예노르트

1969-70 유러피언 컵 우승
1970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1970-71 에레데비시 우승

클뤼프 브뤼헤

1975-76 벨기에 주필러리가 우승
1975-76 UEFA컵 준우승
1976-77 벨기에 주필러리가 우승
1976-77 벨기에 컵 우승
1977-78 벨기에 주필러리가 우승
1977-78 유러피언 컵 준우승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준우승

 

1970년대 최고의 감독에게 수상하는 플래티넘 바통은 포인트 합산 결과 에른스트 하펠을 선정했다.

모든 감독, 심지어 리누스 미헬스 조차도 4-2-4 포메이션에 매몰되어 있던 상황에서 4-3-3 포메이션을 선보이며 효율적인 압박체계를 만들어 페예노르트를 유럽 챔피언 및 세계 챔피언에 올린 하펠은 페예노르트에 머무는 동안 미헬스와 라이벌리를 이루며 1969-70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및 1970-71 에레데비시 우승의 성과를 냈으며 하펠의 전술은 네덜란드의 많은 감독들의 귀감이 되는데 라이벌 팀 감독 미헬스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후 세비야에 잠시 머물렀다가 클뤼프 브뤼헤의 지휘봉을 잡은 하펠은 벨기에의 절대강자 안더레흐트를 상대로 주펄리러가 3연패라는 위업을 냈으며 특히 1977-78 시즌에는 주필러리가 3연패의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유럽 무대에서도 난적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유벤투스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리버풀에게 아쉽게 한 점 차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브뤼헤 감독직과 겸직한 네덜란드 대표팀에서도 하펠은 크루이프의 공백에도 렌센블링크와 크롤을 새 축으로 뛰어난 경기력을 보였으나 대회 내내 편파판정에 시달리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비록 네덜란드 대표팀과 클뤼프 브뤼헤의 최종 결과는 2% 아쉬웠지만 그들이 겪은 고난을 생각하면 하펠이 이 해에 보여준 과정은 대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술사적인 부분에서도 토털 풋볼의 지분 절반 이상은 하펠의 소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영향력을 끼쳤다.

 


5. 토르난테 & Red Archive 공동 선정, 1970년대 최고의 축구선수

 

 

1970년대 최고의 축구선수선정 결과

 

 

 

 

 

토르난테 &  Red Archive 선정 1970년대 플래티넘볼

 

 

 

 

이름: 프란츠 베켄바우어
출생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서독
평가 기간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뉴욕 코스모스

 

1970년대 토르난테 & Red Archive 선정 FCU 어워드 골든볼 2회 수상
1970년대 토르난테 & Red Archive 선정 FCU 어워드 올해의 선수 최종 노미네이트 8회 선정
1970년대 토르난테 선정 FCU 어워드 Team Of The Year XI 8회 선정

 

총 86포인트를 획득한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77포인트를 획득한 요한 크루이프를 제치고 1970년대 세계 최고의 선수의 자리에 올랐다.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비록 고점의 크루이프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크루이프가 1970년대 하반기에 기세가 한풀 꺾였을 때에도 1976-77 시즌까지 세계 최고의 리베로이자 최고 수준의 선수 자리를 유지하며 꾸준하게 고점을 유지해 포인트 부분에서 앞서며 베켄바우어가 플레티넘볼을 수상했다. 플레티넘볼은 높은 최고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오래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부분에서 더 중요한 트로피였기에 베켄바우어는 크루이프를 제칠 수 있었다.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서독과 바이에른의 주장으로 분데스리가 3연패, 유러피언 컵 3연패, 그리고 메이저 국제 대회 3회 연속 결승 진출 및 2회 우승을 이뤄냈다.

이하 베켄바우어의 업적은 상위 문단의 토르난테 선정 1970s Team Of The Decade 항목 참조

 


6. 평가자 소개

 

1. 토르난테


해당 블로그의 주인이자 F.C.U의 회장으로 축구역사 매니아, 중부 유럽과 남부 유럽 그리고 동부 유럽 축구에 관심이 많다.

선수와 감독을 평가하는 부분에서 전술적 상징성과 최고점에서의 퍼포먼스를 굉장히 중시하는 성향

응원팀: 바이에른 뮌헨, 인테르 밀란, 디나모 키이우
 

 

 

2. Red Archive


F.C.U의 회원으로 축구역사 매니아, 특히 남미 축구에 관심이 많다.

선수와 감독을 평가하는 부분에서 토르난테에 비해 상징성보다는 어빌리티에서 더 섬세하게 평가하는 성향

응원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CA 인데펜디엔테, 아스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은 힘이 됩니다.  

댓글 1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23/24 시즌 결산 이벤트 정산] 리무루 493 4
공지 [2024년 신년인사 겸 첫 공지] 9 리무루 781 4
공지 국내기사 전문 혹은 대부분을 긁어오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는 이유 1 김수윤 4538 14
공지 축구정보/칼럼 갤러리에서 글 쓰실 때 제발 공지사항을 꼭 읽어주세요 김수윤 3927 17
공지 FMNATION 축구정보/칼럼 갤러리 공지사항(2020. 9. 13~) Giallorossi 3975 51
공지 축구정보/칼럼 갤러리 연재 시리즈(2019. 10. 16~) 6 Giallorossi 5373 17
인기 [오피셜] FC 바이에른 뮌헨, 뱅상 콤파니 감독 선임 시너 1 0
축구칼럼
이미지
김헌곤 16 2
축구칼럼
이미지
강미나 280 31
축구칼럼
이미지
정진솔 136 8
축구칼럼
이미지
varclub 415 9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60 4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20 6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33 4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25 7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12 6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193 5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72 4
축구칼럼
이미지
비이인 87 6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228 6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134 4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476 6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75 7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74 3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102 5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164 4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66 4